[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일제에 독립을 바라는 강력한 의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주권을 되찾기 위한 국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응하였고 결국 잔혹한 탄압에 의해 3·1운동은 끝나버렸다.
 
하지만 3·1운동은 허무함을 남기지는 않았다. 국민들은 더욱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고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을 지도하고 이끌어 갈 정부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1919년 3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세워졌고 4월 11일에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4월 23일 서울에는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 정부는 그러나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9월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상해는 일제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외국 공사가 많아 독립을 외국에 알리기 용이하였던 지역이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던 민족사를 계승하고 정통성을 지닌 임시정부로서 이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이번 운동을 통해 외세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립을 도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위치에 있다 보니 미국 등을 위시한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화적인 시위를 해서는 3·1 운동처럼 무자비한 탄압에 대응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민중 사이에서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광범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일제 역시 무력으로 제압하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저력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때문에 그 동안 강압적인 식민 통치방식이었던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선회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폭력과 압박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 민족의 반일 투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유호 정책을 쓴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좀 더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속은 오히려 더욱 치밀하고 은밀하게 한국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이었다. 3·1운동은 중국의 5·4 운동과 간디의 인도 비폭력 무저항 운동 등 아시아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비록 일제의 폭압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3·1운동은 자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과 저력을 보여줬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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