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1년, 일본총독부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감옥에 가뒀다.
 
이로 인해 애국계몽운동 비밀결사였던 신민회가 해체되었고 신민회 계열의 인사들인 이회영, 이시영의 6형제와 이상룡, 김창환 등이 선발대가 되어 만주 서간도의 삼원포에 이주하였고 이 곳에서 ‘신한민촌(1910~1911)’을 건설하였다.

또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한인대회 개최 후 경학사(1910~1911)를 조직하여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한인의 이주와 정착, 경제력 향상, 항일민족의식 고취 등을 목표로 활동을 벌였으나 대흉년이 발생하는 바람에 조직이 무너지고 말았다.
 
1912년에는 부민단이 결성되어 한인 자치와 일체 사고를 담당하고 중국인과의 분쟁 처리 등을 담당하여 한인들의 생활을 돕기 시작했다. 또한 신흥강습소를 신흥학교로 발전시켰으며 서간도 각지에 노동강습소를 개설하여 이주 한인들의 자제들에게 민족 교육 및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군 양성을 꾀했고 통화현 팔리초구에 ‘백서농장’을 건설하여 이들 중 385명을 선발, 혹독한 무장훈련을 실시하는 등 일본군에 맞설 무력을 증진시키고 있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외부에서 힘을 기르는 전략을 세웠다. 만주는 중국의 영토라 일본이 함부로 할 수 없었는데 중국 본토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에서도 간섭이 적은 지역이었다.
 
또한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언제든 진열을 정비해 한반도에 침략해 있는 일본을 공격할 수 있었고 또한 산악 지형이 많아 일본군이 독립군을 소탕하러 왔을 때 게릴라전을 펼치기에도 좋았다.
 
일제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 타향에서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 이처럼 본격적이고 일제에 타격을 주었던 독립운동은 국외에서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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