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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덕종어보의 주인 덕종, 왜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지 않았을까?
  • 보도본부 | 김지영 기자
  • 승인 2017.10.0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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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김지영/디자인 김민서] 지난 2015년 미국에서 반환된 ‘덕종어보’가 최근 진품이 아닌 재제작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덕종어보는 1471년 제작되었는데 미국에서 반환받은 덕종어보는 1924년 일제강점기 때 다시 제작된 재제작품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시 제작된 덕종어보는 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제작하고 봉안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 때문에 문화재청이 사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논란이 인 바 있다.

여기서 ‘어보’라는 것은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일반적으로 왕, 왕비, 왕세자 등 왕실의 의례용 도장을 통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어보 앞에 붙은 시호 ‘덕종’으로 보아 왕인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왕 계보를 찾아봐도 이러한 임금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이유부터 말하자면 덕종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세상을 떠났고 이에 임금으로 추존된 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까지의 기록을 적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덕종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덕종의 삶은 어떠했을까?

덕종은 조선 제 7대 임금 세조와 참판 윤번의 딸 정희왕후의 맏아들이자 9대 임금 성종의 아버지이다. 원래 어릴 때 이름은 이숭(崇)이었으나 후에 장(暲)으로 고쳤으며 자는 원명(原明)이다.

덕종은 1445년(세종 27) 도원군에 봉해지고 1455년 아버지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면서 의경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 소혜왕후 한 씨를 세자비로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하였으나, 병약해 잔병치레를 자주했다고 한다.

특히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다고 한다. 이때 의정부 당상관, 육조판서와 좌찬성 신숙주, 도승지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쾌유를 기원하였다.

하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덕종의 죽음으로 왕위는 둘째 동생인 해양대군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바로 조선 제 8대 임금인 예종이다. 하지만 원래 예종도 몸이 병약해서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로 하고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을사군을 왕으로 삼았다. 이가 바로 조선 9대 왕인 성종이다.   

결국 아버지가 원래 받아야 할 왕위를 잇게 된 성종은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신위를 모시고자 하였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불거졌고 왕으로 추존하는 것에 찬성한 신하들도 종묘에 신위를 모시는 것에는 반대하고 나서면서 조정에 논란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왕이 된지 6년째인 1475년, 독단적으로 이 일을 밀어붙여 의경세자에게 덕종이란 시호를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왕으로 추존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던 덕종. 하지만 그 이후에도 덕종어보는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했고 해방 뒤 전쟁으로 문화재 관리가 되지 않아 재제작품마저도 유출되었다가 지금은 모조품 논란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런 덕종어보가 오는 10월 29일까지 문정왕후어보(文定王后御寶)와 현종어보(顯宗御寶)와 함께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공개된다고 한다. 사연 많은 덕종처럼 재제작품도 사연이 많았던 덕종어보를 관람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김지영 기자  mellow0311@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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