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860년대 이후로 빈곤과 기아를 면하기 위해 간도와 만주,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에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한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또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악화되자 1905년 이후 더 많은 한인들이 만주로의 망명이 늘어났다. 게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로는 훨씬 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민족 운동가들은 만주 북간도에 국외 독립 운동기지를 최초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1906년 8월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가의 망조를 예견한 이상설은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한인의 자제를 모아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이 학교는 이상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1907년 4월 만국 평화회의가 개최되는 해이그로 출반한 후인 그해 10월경까지 운영되었다.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김약연의 주도로 명동촌에 명동학교(1908)이 설립되어 북간도 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교육 기관 뿐 아니라 자치 단체도 설립되게 된다. 대종교도인 서일을 중심으로 조직 된 중광단(1911)은 길림성 왕청현에 설립되어 의병의 훈련과 군사 간부를 규합하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무장 투쟁을 하는 것 자체는 미비한 수준이었다. 또 북간도에서는 정재면, 이봉우 등이 중심으로 하여 북간도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간민회(1913)이 설립되었는데 1914년 해산하게 된다.
 
만주와 연해주 등 많은 독립 운동가 및 의병들이 망명을 하고 세력이 커지자 서일 등 39인이 ‘독립 전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무오독립선언(1918. 11)을 선포하며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게 된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