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문명사회의 척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국가권력의 투명성과 제한성이 으뜸으로 꼽힐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작금의 북한 체제를 반(反)문명사회의 표본으로 삼는 것도, 이 체제가 북한 인민들의 생존과 자유를 박탈한 채 오로지 체제 보위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일부 예외적인 현상은 있지만, 세계는 대체로 문명화의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 이것은 대다수 민중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 자유 민주 질서가 대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 데서 연유한다.

   특히 지금 우리가 구가(謳歌)하고 있는 지식․정보 시대는 원천적으로 권력자들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반면에 시민들의 저항권은 광범위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환경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가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것도 지식․정보 시대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지식․정보 시대에서는 권력자와 공직자들의 언행들 대부분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시민들의 반응 역시 즉각적이기 때문에 국가 경영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과거 시대에 통용되었던 ‘정보를 독점으로 한 시민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국가권력으로서는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민주 국가든 독재 국가든 모든 국가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정보기관을 운영한다. 특히 국가권력의 정통성이 부족하거나 정통성이 있더라도 국민의 지지도가 떨어질 경우에는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정보기관들은 정보에 대한 취합과 분석을 넘어 때로는 공작과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정보기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북한과 대치해야만 했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보기관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체제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정보기관의 활약상 덕분에 대한민국 체제를 지켰다는 변론이 가능하고, 반대 쪽에서는 인권 탄압의 상징으로 정보기관을 거론하는 편이다.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보원의 개혁은 중요한 국정 과제로 대두되었지만,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물갈이는 있었어도 본질적 의미의 개혁은 없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특히 국내 정치에 대한 개입을 금하는 대신 해외 정보 등 다른 부문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식․정보 시대의 상징적 인물인 빌 게이츠(Bill Gates)는 “지식과 정보가 흘러넘치면 넘칠수록 그것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발언한 바 있다. 이것은 국가정보원에게도 해당되는 금언이다. 즉 국가정보원은 말 그대로 정보의 양(量)이 아니라 정보의 질(質)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는 16년 전인 1997년에 ‘제국’ 미국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체스판(The Great Chessboard)’인 유라시아에 대한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고 주창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패권은 유라시아의 주요 국가들에 대한 지정학적 책략과 외교 역량에 달려 있다는 취지였다. 그 사이에 세계 정세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브레진스키의 혜안은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특히 ‘체스판 중의 체스판’인 한반도의 주요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외교력에 따라 향후의 국운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도, 국내 언론들이 여기에 관심의 초점을 모았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널리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외교력에서는 최고의 외교관인 대통령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관련 국가기관들이 이를 잘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 중에서도 국가정보원의 역량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여전히 외교는 고급 정보에 바탕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정보원은 국내 정보에 대한 비중을 최대한 줄이고 해외 및 북한 분야에 대한 비중을 대폭 늘리는 방향으로 기능을 재조정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일수록 국가 간 외교력의 경쟁이 치열하고 이에 따라 소프트 파워가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국가정보원이 여기에 제대로 기여할 수만 있다면 그 존재이유는 더없이 부각될 것이다. 반면에 국내 정보는 굳이 국가정보원이 이를 수행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게 별로 없다. 오히려 공공 분야와 민간 분야의 활력을 침해할 수 있다.

   지금 국가정보원은 기로에 서 있다. 일부 국가정보원 간부들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은 재판을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그 문제보다는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뜨거운 감자’이다. 대화록 공개가 바람직한가의 여부는 소속 정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 발언의 적정성 역시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시기적으로 국가정보원의 공개 행위가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원 일부 인사들의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물 타기할 의도로 공개했다는 야당의 주장이 먹힐 수도 있을 만큼 절묘한 시점이다. 게다가 국가정보기관이 내밀하기 짝이 없는 정상회담의 내용을 샅샅이 공개한 전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국가정보원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비교적 성공적인 중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그 성과가 대화록 정국에 파묻히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여당과 야당은 작년에 각종 의안을 가급적 여-야 합의로 의결하는 방향으로 국회법을 고쳤는데, 대화록 문제 때문에 그 정신은 사라지고 사생결단 식의 정면충돌로 치닫고 있다. 이것이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보다 자신감 있게 국정을 운영하고자 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쉬운 것은 국가정보원이 좀 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대화록을 둘러싼 시중의 의혹을 푸는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해야 할’ 국가정보원의 특성에 맞지 않는 결정이었다.

   대화록을 통해 드러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부적절한 것이 사실이다. 민주당 안에서도 당황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을 터이다. 그래서 더욱더 민주당은 투쟁의 강도를 드높일 수밖에 없는 신세이다. 대화록 내용이 쟁점이 되면 불리하기 때문에, 대화록을 공개한 정치적 배경을 문제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이 투쟁을 통하여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나친 투쟁은 결국 민주당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당은 김한길 대표 체제를 맞으면서 지난날의 여러 가지 시행착오들을 극복하겠다는 다짐까지 했는데, 또다시 길거리로 나서면 그 다짐은 공염불이 될 뿐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기관들의 선진화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주요 국가기관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이유마저 의심케 하고 있다.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모두 국민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행정부 안에서도 특히 국가정보원과 검찰-경찰 등 정보기관 혹은 사법기관들이 과거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국회와 정당들이 펼치는 경쟁 양식 역시 지나치게 당리당략적이고 소모적이다. 아스팔트에서의 충돌은 ‘국회 무용론’에 힘을 실어주게 될 뿐이다. 이 슈퍼 갑(甲)들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 없이 대한민국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대한민국의 공공 거버넌스(governance)는 대수술을 기다리는 만성병 환자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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