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8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하였는데 특히 쌀값의 폭등으로 인한 생활고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여 이른바 ‘쌀소동’이라는 정부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일본의 공업화로 인해 농민이 줄어들자 식량이 부족하게 되어 식민지로 삼은 한국을 일본의 식량, 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산미증식계획(1920-1933)이다.

일제는 수리조합을 활성화 시켜 수리 시설을 개선하고 개간과 지목을 변경하는 등의 토지개량을 시켰다. 또한 시비(비료)를 증가하고 경종(작물의 배치)법을 개선하여 미곡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이를 일본 미곡시장으로 이출하여 일본 내의 쌀가격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이루어진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사업은 시행됐지만 경종법 개선과 시비증가가 수반되지 않아 실제 수확량은 일본의 예정에 훨씬 미달하였다. 하지만 일본으로의 이출량은 같은 기간 동안 약 100%가 증가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한국의 1인당 미곡소비량은 줄어들어 더 굶주리게 되었다.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제2차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다 1930년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쌀가격이 폭락하였고 일본 내의 한국쌀 유입으로 인해 일본의 쌀값이 더욱 폭락할 위험이 높아지자 1934년 중단하였다. 총 증수량은 목표액의 34%에 불과했지만 이전보다 3배나 많은 쌀을 일본에 유출해야 했기에 한국의 굶주림은 더해갔다. 

1933년 대풍작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민들은 쌀부족을 겪어야 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만주의 조 같은 값싼 작물들을 수입해야 했다. 또한 미곡의 상품화를 통해 농민층의 계층 분화가 촉진되었고 한국의 농민 경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산미증식사업을 통해 일본인 대지주들은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한국인 자작농과 중소지주는 점점 몰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의 중심에는 수리조합이 큰 역할을 했는데, 수리조합은 일제의 금융과 행정적인 지원 아래 일본인 대지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토지생산성이 높아졌지만 대부분의 이익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그에 비해 중소지주와 자작농 등은 대지주로부터 과다한 수세부담과 부당한 공사비 전가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에 불만이 쌓인 농민들은 수리조합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국 땅에서 쌀 생산의 발전을 이룩하게 했던 산미증식계획. 하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전부 일본이 가져갔고 한국민들은 더 큰 굶주림과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나라도 빼앗기고 식량도 빼앗기는 기막힌 상황...그렇게 일제의 만행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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