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문선아 선임에디터 /디자인 이연선 pro]

▶ 앤디 워홀 (Andy Warhol, Andrew Warhola Jr.)
▶ 출생-사망 / 1928. 8. 6 – 1987. 2. 22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미술
▶ 주요작품 /  캠벨 수프(1962), 마오(1973), 영화 잠(1963년)

앤디 워홀은 미국의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다. 만화, 배우사진 등 대중적 이미지를 채용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구사하였고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한 팝 아트의 대표적 존재다.

-뉴욕에서 알아주는 상업 디자이너 앤디 워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앤디 워홀은 회화와 디자인으로 유명한 카네기 공과대학(현재는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1950년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트 디렉터 클럽, 미국 그래픽 아트협회,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등으로부터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다.

그는 상업적 작업에 주로 몰두했지만 때론 다른 테크닉과 스타일을 시도해보곤 했다. 그는 단지 보여 지는 것을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곧 선에 잉크를 실어 종이에 전사하는 "브로테드 라인"(Burottedo line)이라는 대량 인쇄에 적합한 기술을 발명했다.

-순수 미술에 대한 목마름, 유명 브랜드 상품을 미술화 하다

상업 디자이너로 성공한 그였지만 늘 ‘순수 미술’에 목말라 했다. 그는 '배트맨’, '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지만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하여 시대를 풍미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다른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대량 생산되는 대상에 호감을 느꼈고 영사기나 고무도장처럼 기계화 과정과 유사한 테크닉에 큰 매력을 느꼈다. 초기에 그는 코카콜라 병, 켐벨 수프 캔 등 유명 브랜드의 상품을 그림으로 그리다가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바꿔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으며 당시 미국의 물질만능주의를 반영했다. 마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먼로가 출연한 영화 ‘나이아가라’ 홍보용 사진을 입수해 실크스크린으로 대량생산을 했으며 캠벨 수프 캔 시리즈는 미술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작업공간이자 사교장이었던 ‘팩토리(The Factory)’ 설립

1964년 그는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고 하는 스튜디오를 지었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이미징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아트 워커)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팩토리는 작업장이면서 사교장이기도 했다. 팩토리에는 믹 재거(롤링 스톤즈),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여 늘 북적였다.

앤디 워홀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 프로듀싱과 자켓 앨범을 디자인했다. 전위적 음악으로 앨범은 별로 판매되지 않았지만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 졌다.

-솔라니스의 저격, 그녀는 왜 워홀을 쐈는가

1968년 앤디 워홀은 팩토리 스튜디오 직원 발레리 솔라니스에 저격당했다. 그녀는 워홀에게 자신이 쓴 연극 제작을 부탁했지만 워홀은 이를 거절했고, 극본도 돌려주지 않았다. 솔라니스는 극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워홀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영화 '나는 남자다'(1968)에서 배역 하나를 줬다.

그러나 회유에 만족하지 못한 솔라니스는 팩토리에서 나오는 워홀을 기다려 총을 쐈고, 총 3발 중 1발이 워홀의 폐와 위, 간 그리고 목을 관통했다. 그는 응급 수술 뒤 살아났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다.

후에 솔라나스는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며 저격 이유를 밝혔다.

-인물 초상화로 돌아온 앤디 워홀

저격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앤디 워홀은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하고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1970년 〈라이프 지〉에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됐다.

앤디 워홀은 미국의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한 화가였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할 만큼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를 그리면서 인류, 진부, 공허함을 표현했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인 것을 강조했다. 그가 죽은 뒤 지금까지도 그의 명성은 여전히 증식 생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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