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지영] 6·25전쟁이 내일로 67주년을 맞는다. 잔혹한 전쟁의 현장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많은 참전유공자분들을 기리고 그들이 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PART2에서는 PART1에서 미처 다 듣지 못했던 ‘김성렬’ 어르신의 6·25전쟁 이야기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어르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PART2. 수 많은 위험과 이별 그리고 전쟁 후

-6·25전쟁 중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 없었겠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위험했던 상황은 언제였나요?

숱한 위기를 만났지요. 부상자를 헬기에 실어 보내는 것은 부상자도 위험하지만 우리도 위험해요. 왜냐하면 헬기때문에 우리 위치가 어느 지점인지 북한군이 대충 알거든요. 그래서 부상자를 후송한 이후에 포가 떨어졌던 경험이 여러 번 있습니다. 어느 날은 부상자를 후송 헬기에 실어 보내는데 포탄이 떨어졌어요. 저는 그때 화장실에 있었는데 바로 제 옆에 포탄이 쾅하고 떨어졌습니다. 조금만 더 비껴 떨어졌으면 목숨을 잃을 뻔 했죠.

또 한 번은 아군 없이 혼자 호에 고립된 적도 있었어요. 적이 계속 공격해오니까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제 총을 메고 호에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북한 탱크가 쏜 포탄이 쾅쾅 터졌어요. 그러다 포탄이 다 떨어졌는지 안 쏘는 겁니다. 그 틈을 타 탈출을 했는데,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꽹과리를 든 중공군을 만나 도망치기도 했죠. 그렇게 계속 후퇴하다가 아래쪽에 모여 있었던 국군과 만났습니다.

당시 매일같이 공격을 하던 상황이었어요. 우리도 출동명령을 받고 능선을 타고 올라가던 중이었는데 포탄이 바위 앞에 정통으로 떨어졌어요.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보니 정수리와 얼굴에 파편상을 입었더라고요. 지금도 여기 이렇게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정말 긴박했던 상황들이었는데 혹시 그랬던 중에 기억에 남는 전우가 있었나요?

4월이었을 거예요. 한 동기생을 만났어요. 황해도의 농업전문학교를 다니던 동기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전문학교가 있었어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정도인데 나이가 저보다도 2살이 위던 동기생이었습니다. 어디에 배치된 줄 몰랐는데 위생병으로 파병된 그 동기생을 우연히 만난거예요. 그래서 다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환자가 많이 났다는 소식에 그 친구하고 저도 같이 그곳으로 갔어요. 그런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 친구가 팍 쓰러졌어요. 그래서 보니 총알에 머리를 맞은거예요. 바로 응급처치를 했는데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그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지인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참 착잡하셨겠어요. 또 다른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전쟁시절에 어머니가 64세에 돌아가셨어요. 그 이유는 중공군이 김포에 있다 나갔는데 그 중공군들이 왔다 가고나서 전염병이 생겼대요. 그래서 부락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는데 저희 어머니도 51년도 6월 2일자로 그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것도 51년도 8월 15일 낮에 처음 소식을 받았어요. 그 때 부대에 있는데 ‘김창렬이 편지 왔다.’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받아서 한참을 읽어보는데 ‘모친이 별세했다’라고 되어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니까 ‘별세’가 뭔가 한참을 생각했어요. 보니 이별이라는 별자에 세상이라는 세자니까 ‘세상을 이별했다. 아...돌아가셨구나.’ 혼자 해석을 하고 막 울었어요. 그래서 휴가신청을 했는데 지금 전시가 돼서 휴가가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어머니는 제대하고 나서 찾아 뵐 수 있었던 건가요? 제대는 언제 하셨어요?

네, 그렇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됐는데 55년에 제대신청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순서가 있어요. 군대에 먼저 들어온 사람부터 한달에 몇 사람씩 제대를 해요. 그래서 저는 56년 6월 30일부로 만기제대를 했어요. 69개월인가 군대 생활을 한 거죠.

-제대 하고 나서는 어떤 생활을 하셨어요?

제대 하기 전에 후방에 있었을 때 신문을 보니 통신고등학교라고 무상이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신청을 해 공부를 하다가 그것을 끝마치기 전에 제대를 했잖아요. 그래서 제대하고 그것을 마쳤죠. 또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내 친구들은 다 대학생이에요. 나는 국가를 위해서 이렇게 싸웠는데 저 애들은 후방에서 공부하고 저러고 다니는구나라고 생각되나 한편으로 심통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공부를 해야겠다해서 대학을 들어갔죠.

대학시절에 결혼도 했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시장에서 내복, 양말, 수건, 이런 것들 장사도 했어요. 그러니까 아침에는 물건팔고 저녁에는 학교가고 그렇게 반복하며 살았는데, 군대생활 적전지에 있었던 정신이 단련이 됐나봐요. 힘든지를 모르고 살았어요.

이후에 4.19혁명, 5.16군사정변이 났잖아요. 그러고 나니 대학교 졸업하려면 학사고시에 합격해야 졸업장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졸업장이 없으면 취직을 못했어요. 그래서 죽자사자 낮이나 밤이나 강의를 받았어요. 그래서 학사고시에 합격을 했어요. 졸업하고 일반회사에 들어갔다가 철강회사에서 중견사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 후 합격하고 그 회사에서 15년 근무했어요. 그렇게 살아왔어요.    

-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지금 젊은이뿐만 아니라 60대 이하된 분들은 6·25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6·25전쟁이 정말 비극적이고 치열했고 우리 국토가 아주 초토화 됐었죠. 그런데 지금 현재 초토화됐던 곳이 정말 발전되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이 그때 북한군을 물리치지 않았으면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이 됐겠느냐 그걸 알아줘야 되는데 몰라주고 있어요.

전쟁 후에도 산업전선에 뛰어들어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며 이렇게 발전을 시켰는데 6·25참전 유공자들 대우가 아주 미약해요. 저희들은 월 22만원을 받아요. 평균나이 87세인 우리 노인들 약값도 안돼요. 손자들에게 과자 한봉지를 못 사줘요. 그 심정 정말 안타까워요.

또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6·25전쟁이 어떻다라는 것과 나라사랑, 호국정신을 갖는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안보정신을 정확히 확립하는 것이 우리 국격을 배양시키는 것이다를 좀 알아줬으면 합니다.

인터뷰 중간중간 눈물을 훔치기도 했던 김성렬 어르신. 이제 호국보훈의 달 6월도 얼마남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옛 자료들을 추적해 아직 유공자로 등록되지 못한 분들을 찾아 등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분들에 대한 지원과 예우가 더 향상되기를 바라며 우리 스스로도 나라를 위해 힘쓴 분들을 기억하고 그 공적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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