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최근 한 한국사 강사가 33명의 민족대표에 대해 폄훼하는 강의를 했다며 폄훼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해당 강사는 역사 평가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함을 밝히며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는데 33명의 민족 대표는 누구이며 왜 논란이 되는 것일까?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인물들이다. 

천도교 제 3세 교주였던 손병희와 천도교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다. 1919년 2월 초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손병희와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고 이를 위해 대한제국 고관들과 접촉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33인의 민족대표(민족 기록화)

이에 이들은 개신교, 불교, 천주교, 유림 등의 종교계 유지들을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는데, 천주교와 유림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인해 참여하지 않았고 개신교는 사전에 개신교 내의 민족, 독립운동을 탄압한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 2인이 손병희를 총대표로 하여 33명의 민족대표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였으며 당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를 제외한 29명이 태화관에 집결하여 오후 2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는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이들은 집회가 커지면 일본의 무력진압에 의해 시민들이 희생당할 것을 우려해 곧바로 일본 경찰들에게 자수하여 잡혀갔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들을 탑골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 등 시민들은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학생 측이 선언문을 낭독, 만세운동을 감행했다. 따라서 민족대표들의 자수가 만세운동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들의 부재로 인해 만세운동의 컨트롤 타워가 없어 일본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문을 만들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만세운동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 옥고를 치르는 중에 변절자가 생긴 점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평가가 절하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에 독립선언을 했다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며 일제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민족 계파를 통합하였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속했던 열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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