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 의학은 초기에 고려 의학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의료제도 등이 혁신이 되면서 전문의방서들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문의방서로는 우리 나라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져 온 한의방서들을 분리하고 재편집하여 배우기 쉽게 한 ‘의방유취(醫方類聚)’(266권)이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거치고 나서 우리나라는 불세출의 의학서가 출간된다. 바로 ‘동의보감’이다. 

1592년, 왜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는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민간에서 사용되던 대다수의 의학 서적들이 도난을 당하거나 불태워져 의술을 행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고 이에 1596년 선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의(首醫) 허준에게 새 의학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이에 허준은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김응탁(金應鐸), 정예남(鄭禮男), 정작(鄭碏)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는데 책을 편찬하기 앞서서 세가지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이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병이 이미 나면 몸이 축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둘째, “무수히 많은 처방들의 요점만을 정리한다.” 여러 의학서들의 중구난방인 처방들을 정리하려는 목적이다.  

셋째,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 의원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어느 곳에서도 주변에서 나는 약초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쉬운 이름과 한글로 만든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런 원칙을 통해 제작이 되려 했지만 1597년 왜군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이 발발해 참여 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후부터 허준은 단독으로 동의보감을 편찬해야 했는데, 그 전에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를 먼저 편찬해야 했다. 

이 3가지 의학서는 편찬을 했지만 동의보감은 허준이 바빠 완성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선조가 승하했다. 이에 허준은 선조 생전에 임무를 완료하지 못한 책임으로 의주에 유배되었고 오히려 시간이 많아진 허준은 그 곳에서 편찬에 전념할 수 있었다. 

1609년 허준은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와 1610년 8월 드디어 동의보감을 완성시켜 광해군에게 바쳤다. 이에 광해군은 허준에게 좋은 말을 하사하였고 3년이 지난 1613년에 출판되었다.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을 잘 정리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뿐만 아닌 예방하는 차원까지 다룬 동의보감은 백성들이 활용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매우 큰 의의를 가졌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인기리에 활용되어 조선 의학의 위상을 높였으며  2009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현재에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의학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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