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 정부는 불같이 일어난 동학군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되자 청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과 맺었던 텐진조약을 빌미로 삼아 조선 땅에 군사를 보냈다.

 

정봉준은 외세가 개입될 것을 우려하여 조정과 폐정 개혁안을 합의하며 휴전을 진행했다.

사태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은 애초에 조선을 침략할 마음을 가지고 군사를 출병시킨 것이다. 이들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강제로 내정을 개혁시켰다.(갑오개혁/1894) 이를 통해 일본은 청과의 조약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조선의 요청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여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 땅에서 발생한 청일 전쟁은 예상 외로 일본이 압승을 해 버렸고 의기양양해진 일본은 조선을 본격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다시 동학군을 봉기하기로 결심하고 척왜(斥倭:왜를 물리친다)을 외치며 다시 동학농민군을 일으켰다. 이를 2차동학농민운동(1894년 9월)이라 한다.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농민군까지 합세해서 11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공주로 쳐들어간다.

하지만 일본이 대국인 청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신식 무기들은 보잘 것 없는 무기를 지닌 동학군을 손쉽게 무찌를 수 있었고 결국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절망적으로 참패하였다.

큰 패배 후 동학군은 일단 해산했다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1894년 12월 30일 밤, 전봉준이 이 붙잡혀 1895년 4월 23일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부패한 관리의 가렴주구로 인해 봉기됐다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다시 봉기되었던 동학농민운동.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린 조정 때문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 정신은 후에 항일의병과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는 등 민초들의 힘을 보여줬던 운동이 아닐 수 없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