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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조선시대 광업의 변천사 [키워드 한국사]
  • 뉴스제작국 | 이호 기자
  • 승인 2016.12.18 17:59
  • 댓글 0

[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5세기 농민들이 자체로 철을 생산 또는 구입해서 국가에 바치는 공철 제도가 있어 정부는 토지 면적에 따라 일정량의 철을 수취하였다. 또한 정부는 인력을 동원하여 철을 채취하던 관영 광업장인 철장을 운영하여 각 영과 진에 철을 공급했다.

   
 

정부는 철이 생산이 되는 마을에 철광산을 지속적으로 개설하여 봄과 가을 등 농한기에만 농민을 동원하는 철장 도회제도를 실시했다. 철장은 전국에 20여 개소가 있었고 각 철장에서는 정부가 파견한 철장곤이라는 관리자가 200여 명의 취련군을 동원하여 일과제 생산을 하였다.

이처럼 군수에 운용되고 농기구 생산에 큰 역할을 하는 철은 조선 초기까지는 국가가 관리를 하였다. 하지만 야장(대장장이)들이 개인적으로 경영하는 야철 수공업이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철 생산지에서 철광의 채굴과 제련에 종사하고 철물 제조업을 경영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야철 수공업이 성장하여 철물의 구입은 매우 용이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역제를 이용한 관영 철장 경영은 자연스럽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세조 7년인 1452년에는 전세와 공납에 대한 대납을 허용하기 시작됐다. 때문에 미곡 대신 공철도 세금으로 낼 수 있도록 제도가 개편되어 야철 수공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철장을 보유한 마을에만 공철을 부과하는 ‘각읍채납제’가 시행되었으며 철물 수공업자들에게 장세를 징수하는 등의 변화도 있었다.

16세기부터는 철장과 수철장 등의 철물 수공업자들이 성장함에 따라 대납제가 보편화 되면서 정부도 철물이 필요하면 철상들로부터 쌀과 포를 내고 구입하게 되었다.

양난(임진왜란, 병자호란)이후 왜와 청에게 호되게 당한 정부는 조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각 마을에 충당해야 할 조총의 양을 할당(각읍월과군기법 : 인조 14년 1636)하였는데 각 군현은 조총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거나 민간 조총 제조업자들로부터 구입해야만 했다.

효종 3년인 1651년에는 양난 이후 파탄된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인에게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광업이 사업 성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쉽게 광업에 투자를 하는 대 상인들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17세기 말 정도 되어서는 전국에 약 70개소의 은점이 설치되는 등 은광 개발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앙의 호조는 은점 개설의 요청을 받고 설점(設店 : 개점하는 것)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은광의 채굴 및 제련 시설을 갖추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호조는 별장을 파견하여 은광에서의 수세 업무를 대행했다.

은점을 운영하는 최고 경영자를 두목(頭目)이라 하였는데 이는 은점 개설을 호조에 요청했던 점장 중 우두머리를 뜻한다. 이들은 호조에 납부하는 세금과 별장, 광군(농촌에서 온 빈민)의 몫을 제한 나머지를 수입으로 가져갔다.

영조 51년인 1775년에는 ‘수령수세제’를 성립하였다. 이는 국가가 점소를 설치했던 별장수세제와는 달리 물주가 호조의 설점 허가를 받아 자기 자본으로 광산을 설치하고 관할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거두는 제도였는데 호조나 지방 수령에게 설점의 허가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광물을 캐는 경우도 많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다.

또한 광맥이 발견됐다고 하는 곳에는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모여들어 시장이 활성화 되거나 생필품 값들이 폭등 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광업은 상업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관리를 하다 민간이 주도하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업성이 불확실했지만 한 번 광맥이 발견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조선 후기에는 대 상인들도 광업에 물주로 나서곤 했다.

이호 기자  dlghcap@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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