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6세기 이후, 한양으로 유입된 인구가 대부분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왜란으로 시전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한양에서는 난전이 늘어나게 됐는데 시전 상인은 이렇게 늘어난 난전으로 인해 이익이 줄어들었고 이를 없애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조선 정부도 왜란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시전 상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시전상인들은 난전을 배재할 수 있는 독점적인 영업권을 원했고 조선 정부는 시전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의 활동을 금지하고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허용했다.

또한 대동법 시행에 따라 공인들이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상(私商 : 개인적인 상행위)의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특허 상인으로 날로 번창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금난전권 외에도 도고는 독점적인 도매 상업이 성행하였다. 도고 상인은 상인, 난전(서울의 사상), 공인, 지방의 사상 가운데에서 출현했는데 박지원 연암집에 나오는 허생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금난전권과 도고들이 횡포하는 가운데 에서도 서울 난전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금난전권이 시전들의 배만 불리고 정부가 원했던 한양의 활발한 물자 유통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을 고려하여 정조 15년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시전 상인들은 자유롭게 관상과 경쟁하면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이현(梨懸 : 오늘의 동대문), 칠패(七牌 :오늘의 남대문), 종루(종로)에서는 국내외의 다양한 물품들이 일반 시민을 상대로 거래되었다.

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유통망에는 중간 도매상인도 등장하게 되는데, 송파, 이현, 누원(노원), 칠패 등 시장을 상대로 하여 물건을 떼다가 지방 장시에 공급하는 중도아가 등장하였다.

사상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 판매하는 난전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들을 교역하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판매를 확장하기도 했다. 또한 관에서만 다뤘던 대외 무역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서울의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평양의 유상 등은 대표적인 거상으로 부상했다.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장시간의 일부는 상설시장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통합과 폐합 과정을 반복하면서 대형화해 가는 동시에 전국적인 시장권을 확대해 갔다. 또한 장시가 발전함에 따라 물류의 원활한 이동을 위한 도로도 확충되어 충청도 강경, 전라도 전주, 경상도 대구, 마산, 안동, 황해도 은파, 함경도 원산, 강원도 대화(평창) 등이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다.

또한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의 역할을 하던 것에 불과하던 포구에서의 무역도 발달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이 규모는 장시보다 훨씬 컸다. 경강 상인은 선박을 이용하여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을 한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또한 이런 포구와 같은 교통 중심지에는 상품의 위탁 판매나 창고업, 화물 수송업과 금융업 등 여러 기능을 겸하는 중간 상인인 객주와 상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여각이 발달하기도 했다. 또한 타인간의 상행위 중개 및 토지와 가옥의 매매, 임차, 전당의 중개를 직업으로 삼는 거간 등 중간 상인들 역시 성행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전답을 잃은 농민들이 임노동이나 상업에 많이 종사를 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이 꽃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경제가 각 지방에 묶여 있던 것에서 전국구 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양민이 부를 축적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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