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기자/ 디자인 이연선 pro] 관람자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신비로운 여인을 그린 ‘모나리자’, 예수가 잡혀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저녁 만찬을 하는 장면을 그린 ‘최후의 만찬’. 두 작품은 모두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역작이다.

다 빈치가 그림은 물론 수학, 건축, 조각 등 다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난 천재라는 점은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가 ‘요리’방면에서도 시대를 앞서나간 불우한 천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동안 요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유년 시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 빈치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는 헤어지고 각각 재혼을 한다. 그 중 어머니 카테리나는 어느 과자 제조업자와 식을 올렸다. 소년 다 빈치는 어머니의 집과 아버지의 집을 전전하며 자라게 되는데 그의 의붓아버지는 다 빈치에게 단 것을 실컷 먹여서 음식과 미각에 대한 열정을 키워주었다.

뚱보가 된 다 빈치는 그 후 피렌치의 베로키오 작업장에서 조각, 미술, 공학, 수학 등을 익힌다. 도제 수업을 마친 후에도 스승 베로키오가 알선해 준 일감이 너무 적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다 빈치는 어려운 생활 때문에 ‘세 마리의 달팽이’라는 식당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우연한 기회로 주방장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기름진 육류를 중심으로 갖가지 요리를 그릇 한 가득 풍성하게 차려먹는 음식 문화다, 그러나 다 빈치는 검은 빵 한 조각에 바질 잎 한 장을 얹어 내놓는 파격을 선보였고, 덕분에(?) 식당의 손님이 점점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1478년 여름. 일 하던 식당은 시비에 휘말려 불타버리면서 자연스럽게 일자리도 잃어버리게 됐다.

다 빈치는 동문이었던 보티첼리와 함께 식당이 있던 자리에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와 세 마리 개구리 깃발’이라는 식당을 개업했다. 다 빈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잘 살린 채식 중심의 담백한 요리를 개발했지만, 피렌체의 시민들은 모두 다 빈치의 요리를 외면했다. 안초비 한 마리를 당근 네 쪽으로 장식한 요리는 피렌치 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 빈치가 개업한 식당은 망했고 그 후 다 빈치는 요리사로 고용되지도 못하고 화가로서 열심히 일하지도 않은 채 피렌체를 배회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482년에 자신이 직접 쓴 추천서를 가지고 밀라노의 왕족가문이자 예술가들의 후원자로도 명망이 높았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찾아갔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다 빈치를 스포르차 궁정의 연회 담당자로 고용했다.

다 빈치는 스포르차의 조카딸의 혼인 연회를 기획했는데 그가 제시한 요리는 “예쁘게 조각한 당근 한 개‘, ’개구리 모양으로 조각한 무 한 조각과 안초비 한 마리‘, 자고새 가슴살’, ‘야생 엉겅퀴 꽃봉오리’ 등이었다. 반면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제안한 요리는 ‘볼로냐산 돼지뇌로 만든 순대 600’, ‘암송아지, 거위 각 200’, ‘베네치아산 굴 2,000’ 같은 요리였다.

스포르차가 다 빈치의 요리법을 모두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은 인정하고 주방을 맡겼다. 물론 다 빈치가 자동 청소 도구, 개구리 도살 장치 등 덩치가 큰 주방 기구를 개발하여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까지 말이다.

다 빈치는 그 이후에도 스포르차 가문의 연회를 한 차례 망쳐 루도비코에 의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다 빈치는 그곳에서 인생의 역작인 ‘최후의 만찬’ 벽화를 3년 동안 작업했는데, 1년 동안은 그림의 만찬에 올릴 음식을 궁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모델로 쓸 포도주를 찾겠다는 핑계로 수도원의 술 창고를 동내고 식당을 찾아가 상 차리는 일에 열중했다.

이후에 스포르차의 성이 프랑스의 루이 12세에게 넘어가자 다 빈치는 루이 12세의 밑으로 들어가 화가로 일하면서 미식의 취미도 공유하게 된다. 또 루이 12세를 이은 앙리 왕과는 특히 식도락가로서 취향이 매우 잘 맞았다. 앙리 왕은 왕궁과 다 빈치의 집과 연결되는 땅굴을 파서 다 빈치가 만든 요리의 맛을 봤다. 또 다 빈치가 개발한 먹을 수 있는 끈(스파게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그 비밀을 캐내고 싶어 했다.

레오나르도는 여생 3년 동안 프랑스 왕과의 식도락으로 보내고 1519년에 죽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포도밭을 나눠 자신의 개인 요리사와 식사 당번을 겸했던 제자에게 남겼을 정도로 요리를 사랑했다.

시대를 앞서갔던 대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요리마저 시대를 앞서가 비록 많은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요리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는 점은 새삼 그가 은근히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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