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한지윤 에디터]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라는 유행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유행어는 1960~70년대에 국민들의 웃음을 책임졌던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유행어다. 구봉서는 지난 8월 27일 향년(享年) 90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구봉서의 막내 아들에 따르면 그가 편안하게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져 슬픔에 잠긴 팬들의 마음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 사진출처/한국영상자료원

평안남도 평안 출생인 구봉서는 1945년에 대동상고를 졸업한 이후 태평양 가극단에서 악사생활을 하며 연예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봉서의 부친은 구봉서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가극단을 이끌었던 김용환이 구봉서의 아버지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고, 아버지가 “딱 사흘만 악사활동을 하라”며 허락한 것을 계기로 구봉서는 희극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구봉서는 1956년에는 ‘애정파도’라는 영화를 통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오부자’(1958), ‘부전자전’(1959), ‘오형제’(1960), ‘맹진사댁 경사’(1962),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누렸다. 특히 히트작 ‘오부자’에 출연하여 ‘막둥이’라는 애칭도 얻게 되었다.

▲ 사진출처/추억이 빛나는 밤에 캡처

한편 구봉서는 1969년 MBC방송 개국과 함께 시작하여 1985년까지 전 국민의 웃음을 책임 진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 와요’에 15년 18개월이나 출연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개콘 같은 프로그램으로 배고프고 힘든 시절에 국민들의 웃음을 책임진 효자 였다. 그가 유행시킨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는 70자가 넘는 이름으로 귀한 자식을 오래 살게 하려고 지은 것이다.

당시 구봉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1세대 코미디언 이었던 고(故) 배삼룡·곽규석·이기동 등과 함께 콩트 연기를 펼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에 반해 희극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은 존재했다. 코미디에 의사가 나오면 의사협회가 항의하고, 거지를 출연시키면 '한국에는 거지가 없는데 왜 거지가 코미디에 나오냐'는 항의를 받았을 정도였다.

▲ 사진출처/아침마당 캡처

또한 문화공보부(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는 코미디언이 주연으로 출연했다는 이유로 구봉서의 영화 ‘수학여행’을 B급 영화로 판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 깔려있는 코미디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테헤란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구봉서는 자신의 코미디를 보며 울고 웃는 대중들 때문에 코미디언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코미디의 본질은 인생살이를 통해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라며 코미디는 단순히 웃기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진출처/YTN 뉴스 캡처

최근에는 자신이나 타인의 외모나 성격을 가지고 자학하는 류의 개그가 유행하고 있는데 구봉서는 이와 관련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는 코미디로는 오랜 웃음을 남길 수 없다고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 사진출처/YTN 뉴스 캡처

이처럼 코미디에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전 국민들의 삶의 애환을 녹여주고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 희극인 구봉서. 그는 유언으로 “코미디언 중에는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조의금 받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떠나는 마지막 모습까지도 후배 코미디언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코미디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자신이 천생 희극인임을 잊지 않고 자랑스러워 했으며 발전을 위해 인생을 바친 구봉서. 그의 바람대로 우리나라의 코미디가 더욱 발전하여 그가 편안히 쉴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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