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조선 후기. 조선의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 관게를 체결하게 되었다. 조선의 임금은 청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여 형식적으로는 청의 종속국이 되어 사대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인들을 중심으로 소중화사상(명의 뒤를 이어 중화를 계승했다는 사상)과 숭명배청(명을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의식을 가지고 청의 문화를 무시하며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은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서양문물까지 받아들이며 명실공히 최대 최강의 문화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도 강력한 청에 대해 더 이상 오랑캐라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결국 청조를 인정하게 되었다.

청조가 인정되자 청에 대한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영조와 정조대를 거쳐 청의 경세치용의 학풍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이 등장하게 된다. 이로 인해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김정희 등의 실학자가 대두됐으며 천리경(망원경), 자명종, 화포, 만국지도, 천추실의 등의 신문물을 들여오게 되는 등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또한 개인상인(사상私商)이 발달하여 대청무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로 인해 역관 무역은 쇠퇴하게 되었고 사상을 통한 무역이 성장하여 청과의 무역을 활발하게 한다.

청은 간도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조선에게 국경을 명확하게 하자는 요구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과 청의 대표가 모여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이다.

그런데 이 내용에서 ‘토문강’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달랐다.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했고 조선은 만주 송화강의 지류라고 주장했다. 이에 조선은 서북경략사인 어윤중과 토문감계사인 이중하를 임명하여 간도가 우리 땅임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범윤을 간도 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를 함경도로 편입했다.

하지만 간도는 추후 일제에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잉에 간도 협약이 체결되면서 간도가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만다.

조선 후기의 외교의 첫 번째는 무엇보다 청과의 관계였다. 무시에서 사대로 그리고 영토 분쟁까지 청과 조선은 사대를 하면서도 북벌을 논하지만 경제적으로 원활한 소통을 하는 미묘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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