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승재]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질은 유희를 추구하는 데 있다며 인간을 ‘호모루덴스(유희하는 인간)’라 불렀다. 인간이 유희를 추구하면서 현재 우리가 즐기는 연극과 같은 공연들이 점차 발전하게 됐다. 그리고 퍼포먼스에 자본이 투입되면서 할리우드와 같은 거대 문화산업이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거대 문화 산업체의 발달은 대중들에게 퀄리티 높은 문화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거대해진 문화산업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잠식했고, 소규모 문화 자본들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갔다.

▲ 출처 /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포스터

이러한 상황에서 설자리를 잃은 소규모 자본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자신들의 공연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이 만들어졌다 바로 ‘프린지 페스티벌’이다. 프린지란 주변, 언저리라는 뜻으로 프린지 페스티벌은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안문화축제의 장을 말한다. 아마추어에서 전문 예술 단체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어 참신하고 독특한 공연들을 만날 수 있는 축제다.

프린지 페스티벌의 시작은 1947년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얼룩진 유럽을 문화예술로 재통합하자는 가치를 내걸고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이 열렸다. 하지만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은 초청받은 단체만 공연할 수 있었다. 이 때 초청받지 못한 8명의 배우가 공터에서 무허가로 공연을 시작한 것이 프린지 페스티벌의 시작이 됐다. 사전에 기획하지도 않았고 조직적인 체계도 없었지만 독특하고 참신한 형식을 선보이면서 관객과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프린지협회에 약간의 참가비만 내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축제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기에 이 후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공연 단체 수는 늘어났고, 프린지 페스티벌은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중심이 됐다. 이후 프린지 페스티벌은 연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1000여 개의 공연 단체들이 200개에 이르는 공연장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는 세계 최대의 축제로 발전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의 성장은 다른 지역으로 프린지 페스티벌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7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도 '오프‘라는 명칭으로 공식 초청 작품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공연들이 등장했고, 1982년 캐나다 애드먼턴에서 프린지 페스티벌이 만들어진 후 북미 전역에서 10여 개의 서로 다른 프린지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한국에서도 프린지 페스티벌은 매년 개최되고 있다. 1998년부터 한국적 프린지의 실험과 모색을 모토로 개최한 ‘독립예술제’를 열었고, 2002년에는 ‘독립예술제’ 5회를 맞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로 명칭을 바꿨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시아 각국의 공연단체들까지 함께 참여하면서 국제적인 성격의 행사로 확대됐다. 이후부터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은 매년 개최돼 올해로 19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면서 독특하고 실험적인 공연들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대 자본의 수익을 위한 콘텐츠만 살아남게 된다면 우리는 성공 문법에만 충실한 비슷한 느낌의 공연, 작품들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추어도, 실험적인 예술가도 누구든 제약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프린지 페스티벌이 세계 각국에서 꾸준히 성장한다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콘텐츠들의 발전할 가능성은 더 커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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