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기자 /디자인 이연선 pro] 7월 9일 남수단에서는 총성과 비명이 한데 뒤섞이며 지옥을 방불케 했다. 이날 사망자만 무려 300명을 넘어 섰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 국가는 자국민의 조속한 출국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의 끔찍한 내전에 앞서 2013년에도 양 세력 간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이때는 무려 수 만명이 숨지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던, 그야말로 끔찍한 내전이었다. 이어진 내전의 이유는 남수단의 대통령과 부통령 세력 간의 심화된 갈등이었다.

사실 현재 인구 1100만의 남수단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현지 화폐가 90% 이상 평가 절하되는 등 경제마저 파탄지경에 빠져 500만 명이 긴급 구호식량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듯 한 나라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힘을 합쳐 정치를 해도 모자를 판에 심화된 내전의 중심에 서며 불행한 나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남수단 갈등의 서막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러하다. 2011년 오랜 내전 끝에 수단으로부터 남수단은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두 번째 신생독립국으로 온 세계의 축복을 받았던 승리의 날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남수단의 독립과 동시에 남수단의 대통령, 부통령을 맡게 된 ‘살바 키르’와 ‘리엑 마차르 사이에 미묘한 불꽃튀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독립 이후에도 2인자의 자리에 머무른 ‘마차르’ 부통령이 종종 ‘키르’ 대통령의 권력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마차르’ 부통령의 위협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키르’ 대통령은 위협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조치를 취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것이 두 세력의 분쟁의 발단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먹구름은 훗날 엄청난 비극의 내전을 몰고 오게 된다.

그렇게 숨 막히는 두 세력의 눈치 싸움이 진행되던 중, 2013년 5월 예정되어 있던 남수단의 전당대회가 개최되지 않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이 일촉즉발의 상황임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2013년 7월 키르 대통령 측이 먼저 움직였다. 마차르 부통령을 포함한 내각 전체를 해임한 것이다.

하지만 키르 대통령의 판단은 수많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대선 후보 자리를 넘보던 마차르 부통령 세력의 강한 반발은 물론, 대통령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혹은 대통령이 권력을 남용하는) 인상을 남기며 국민들 사이에서도 불만세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결국 2013년 말 무력 충돌 사태를 빚게 된다. 12월 15일 한 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대통령 경호원들 중 대통령 추종세력과 부통령 추종세력 간의 충돌이 벌어진 것을 시작으로 며칠 뒤 남수단 5개 주로 무력 충돌이 확산하며, 만 명 이상이 숨지고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하게 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폭발한 갈등은 꺼지지 않으며 계속되다, 지난 9일 또 한 차례 양 세력 간의 큰 무력 충돌로 번진 것이다.

이 두 권력 대립구도가 이토록 빠르게 내전의 양상을 띤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 ‘키르와’ 부통령 ‘마차르’가 다른 종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키르 대통령은 남수단 최대 부족(인구의 15%)인 딩카족이고, 마차르 전 부통령은 두 번째로 큰 부족(인구의 10%)인 누에르족이다.

이 두 부족은 공공의적 ‘수단’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함께 힘을 합치며 군과 경찰을 통합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동의 적 ‘수단’으로부터 해방되자, 두 부족은 권력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는 지독한 내전의 싹이 되었다.

수단으로부터 한마음으로 투쟁하여 얻은 ‘남수단’의 독립. 함께 힘을 합치고 민족의 평화를 위해 독립하려 애썼던 때를 기억하며 다시금 제대로 된 평화를 되찾기를 바라본다. 무엇보다 수많은 국민들의 울부짖음을 똑바로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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