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통해 붕당의 폐단을 상당수 없앨 수는 있었지만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해 주었던 지지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에 중앙에서 밀려난 소론의 불만은 계속 되었고 영조가 껄끄러워하는 경종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든 또 들고 일어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던 중 1755년 나주로 유배를 간 윤지라는 소론 출신이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다는 취지의 벽서를 붙였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조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의 일이 다시 들춰졌고 이렇게 껄끄러워 하는 일이 수면위로 다시 떠오르자 영조는 격노하게 되었고 이때를 노려 노론은 중앙에 남아 있는 소론을 모두 몰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조 25년부터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왕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와 노론의 뜻에 따르지 않고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노론은 왕세자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되고 영조는 그런 세자를 점점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거기에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의 이간질과 세자가 궁내에서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고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의 기행은 점점 부자 사이의 골이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은 세자가 저지른 비행을 알리는 10조 목의 글을 영조에게 고하였다가 무고죄로 참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영조는 세자의 비리와 기행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그 분노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세자 역시 거듭된 무고와 영조의 불신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이에 영조는 윤5월 13일,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으나 세자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쌀 등 곡식을 넣는 궤)에 가둬 굶어죽게 하였다. 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한다.

정실질환을 앓고 있는 세자를 왕위에 올릴 수 도 없었거니와 정치적으로도 대립을 하는 아들을 죽인 영조는 이내 자신이 죽인 사람이 정적이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음을 깨달았고, 이에 후회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할 때엔 제주(題主)를 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영조의 뒤를 이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는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에는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탕평책을 펼친 영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붕당정치, 파벌싸움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사건은 조선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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