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벌써 3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5.18 민주화 운동’은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光州)와 전남(全南)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약 10일간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의 진행과정은 이렇습니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무력으로 순식간에 군부와 정치권을 장학한 신군부세력은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군사독재가 재발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였고,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지속‧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러다 1980년 5월 15일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학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고,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시위 기간 동안은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바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소식이 전해지고, 3일째 되는 날부터는 언론에 보도되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발생된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혔는데요. 사망 191명, 부상 852명으로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고 1년 뒤인 1981년 5월 18일. 피해자 집단과 학생들은 망월묘역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했고, 당시 국가는 추모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탄압했지만 그럴수록 비난의 세력이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5월 계승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하게 실행되어 마침내 1997년 5월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어 지금까지 그 의미가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신군부세력의 독재에 의한 우리 국민, 대학생들이 주체가 된 민주화 운동. 우리나라 땅에 참된 민주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30여 년 전 그들의 희생에 대한 값진 의미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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