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왜는 이순신의 활약에 큰 곤경에 처했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퇴하고 김덕령, 곽재우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

 

이런 중에 왜는 명나라와의 화의를 시작하여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호남지역의 피난민들을 돌보고 병사의 훈련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런 난중에도 조선의 조정은 여전히 당파싸움으로 혼란스러웠다.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원균 때문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 절도사로 보내버렸지만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원균의 편에 서서 이순신을 탄핵한다.

이렇게 눈밖에 난 상태에서 왜의 첩자 요시라가 가토 기요마사라는 인물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출정시켜 막으라는 조언(?)을 해 준다. 이를 곧이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시켜 이순신에게 수군을 출정할 것을 명령했지만 이순신은 이것이 왜군의 계략임을 파악하고 출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은 명령 불복종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거의 죽을 정도로 문초를 받은 후 권율 하에 백의 종군(직책 없이 평민으로 일함/1597년 5월 16일)의 명령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왜는 명과의 화의가 결렬되자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1597년 정유재란). 이순신이 있던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는 원균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해 7월 칠천량에서 대패하여 전사하였고 조선의 수군은 궤멸되고 만다.

상황이 최악으로 흐르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고(8월 3일) 이순신은 남아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궤멸된 수군을 재건했다.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명량 울돌목에서 왜군의 133척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때 조선의 수군은 겨우 병선 13척과 군사 120명뿐. 이순신은 물살이 센 울돌목에 수중철색을 쓸 수 있도록 준비를 했고 이순신의 유인에 걸려 든 왜군은 수중철색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으며 뒤따라 오던 적선들도 이에 충돌하였다. 이순신의 지세를 이용한 이런 전략에 왜적선 133척 가운데 무려 31척이 격파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승리는 제해권을 다시 조선으로 가져올 수 있게 하였으며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된다.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들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충청도에서 멈춰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9월 사망해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이순신은 명의 진린 제독과 연합하여 철수하는 왜군과 노량에서 격전을 벌였다(1598.11.19. 노량해전). 이 전투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맞서 200여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뒀지만 이순신은 도주하는 적선을 추적하다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이순신은 이 상황에서도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여 세계에서 가장 손꼽히는 명장으로 추대받고 있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왜군은 모두 퇴각하여 정유재란이 끝나고 7년간 이어왔던 임진왜란이 종결된다. 이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에게는 극심한 인명과 국토의 황폐화, 자금 소모로 인해 국세가 기우는 위기가 되었다. 거기에 전쟁이 끝나서도 당파싸움만 하는 조정의 쓸데없는 국력 소모는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에도 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된다.

커다란 전쟁을 치러 엄청난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발전하는 모습을 결국 보이지 못한 것이다. 조선은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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