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어떠한 분야에서 혁신을 이룩한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 된다. 첨단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시대를 선도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올해는 고 백남준 선생이 작고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10주기를 추모하며 국내외 젊은 작가와 인문, 과학, 사회학자등이 참여해 전시를 여는 등 백남준을 추모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보는 전시와 행사가 한 해동안 계속 이어진다.

▲ [사진/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 하면 그가 즐겨 입던 멜빵바지와 탑처럼 쌓여 올려진 TV모니터가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낯설었지만 작품마다 신선한 충격을 가지고 있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하는 힘을 지녔었다.

1932년 서울 부유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백남준은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일본 동경대를 졸업해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고 바로 그곳에서 백남준의 인생을 뒤바꿀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되었다.

1958년 뮌헨, 백남준은 그보다 20살 많은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된다. 존 케이지는 현대예술사에 많은 영향을 남긴 사람으로 대표작은 ‘4분 33초’이다.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 관객들이 자연적으로 내는 환경적 소리를 음악으로 사용한 당시에는 파격적인 예술로 동양의 공(空)사상을 풀어낸 놀랍고도 철학적인 예술이었다.

▲ [사진/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은 그의 공연을 접한 뒤 동양의 선불교를 체득하게 되고 존 케이지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예술세계를 뛰어넘는 무음악의 예술 영역을 보여주며 스승을 뛰어넘는 진화된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진입 하게 된다.

존 케이지로 인해 젖어든 선불교 사상은 백남준의 독창적인 예술관과 융합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백남준은 파격을 추구했지만 그 안에 반드시 사유의 힘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후 백남준은 독일에서 막 보급되기 시작한 TV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1963년 그의 첫 개인전에서 13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해 실험 TV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전자 매체에 집중하며 정점으로 올라선다. 몸이 첼로가 되고, 전라의 몸으로 연주하고, TV로 만든 첼로를 켜는 등, 백남준은 전통적인 공연방식에서 벗어났다. 말 그대로 파격적인 행위예술로 세계를 돌며 금기에 대항하고 전통적인 예술을 거부하는 독창적인 예술관을 정립해 나갔다.

▲ [사진/백남준 아트센터]

사실 독창적인 예술은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백남준의 작품도 얽혀있는 TV회로처럼 다소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발 물러서서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면 금세 빠져들게 되는 마력이 있다.

새로운 개념의 작품들로 현대 비디오아트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은 고 백남준. 시간이 흘러도 그의 작품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남준이 예술을 통해 몸소 보여준 창의, 해학, 도전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 층에 꼭 필요한 시대정신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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