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연선CG]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태종의 피의 숙청으로 인해 조선은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과거 고려가 지방 호족들의 권세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웠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조선은 국가가 지방을 모두 지배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조선은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여 주민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였고 향리 등 지방 관리들은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의 힘을 등에 업은 수령을 감독하는 기관인 감찰사는 그 권한이 강화되었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들을 견제 및 감찰하였다.

또한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행정과 군사, 감찰과 사법권을 행사했고 수령들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민생을 순찰하는 역할을 했다. 관찰사는 각 도의 병마 절도사(육군 지휘 책임자), 수군 절도사(수군 지휘 책임자)를 겸하였으며 공정한 감찰을 위해 상피제(지방관을 출신지에 파견하지 않는 제도)를 시행했다.

수령은 왕에 의해 임명되어 왕의 대리인으로 직접 관내의 주민을 다스렸다. 지방의 행정과 사법, 군사권을 가졌으며 조세와 공물을 징수했다. 수령의 임기는 5년이었다.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며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수령과 지방 사족간의 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고려 때 보다 그 권위는 낮아졌다.

하지만 수령보다 때로는 더 강력한 실권을 행하기도 했는데 타지역 출신인 수령과는 달리 해당지역 출신이고 임기가 있는 수령보다 오랜 시간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유교 경전 전문가인 수령보다 실무에서 해당분야에 전문가였다. 그리고 지역사정에 밝아 수령을 속이고자 마음을 먹으면 수령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때문에 수령들은 대부분 향리집단과 타협을 통해 통치 업무의 유연성을 키우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다.

이렇게 수령은 향리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무보수직인 향리들은 부패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신진 사대부들은 향리를 배제하고 양반 중심의 향촌사회를 확립하였는데 유향소와 경재소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유향소는 지방 양반들의 향촌 자치기구로 향청이라고도 불렸으며 수령에게 자문을 제공하고 감시를 하며 백성교화에 힘을 썼다. 향리를 감찰하며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경재소는 유향소 통제를 위해 설치한 기구였지만 임진왜란 후 유향소의 힘이 약해져 필요가 없어져 선조때 폐지되었다.

군 현 밑에는 면, 리, 통을 두고 오가작통제(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편성)를 하여 주민 중 책임자를 선임하였고 수령의 명령을 받아 인구 파악과 부역 징발을 담당하게 했다.

과거 고려 시대에는 주, 현에만 파견됐던 지방관이 조선 시대에는 전국으로 파견되었고 왕과 지방관, 그리고 향촌의 말단으로 이어지는 통치권은 고려에 비해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줬다.

권력의 분산으로 인해 불안감이 늘 산재해 있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전국에 통치권이 영향력을 가졌던 조선. 지방 통치의 틀을 제대로 잡아 500년의 왕조를 누릴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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