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문선아] 지난 22일 군부 시대를 종결하고 최초의 ‘문민 정부’를 세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서거 소식에 세계 곳곳에선 그의 서거를 뉴스로 다루며 애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6.25전쟁, 유신시대, 군부 독재 등 한국 근현대사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몸소 겪은 인물이다. 1954년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며 대통령이 되기 까지 9번의 국회의원을 한 정치계에선 거물급 중 하나다.

▲ 지난 22일 군부 시대를 종결하고 최초의 ‘문민 정부’를 세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출처/SBS뉴스)

1927년 거제에서 태어난 그는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뜬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강직한 성품과 배포를 키우며 살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을 꿈꾸기 시작한 그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 동문들과 학도의용군에 입대하여 학도병으로 활동 했다. 학도병 시절의 인연으로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고 그가 국무총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 1954년 5월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경남 거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의 나이 28세(만 26세), 최연소 국회의원의 탄생이었다.

자유당 소속인 그는 1954년 자유당이 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해 3선 개헌활동을 할 때 3선 개헌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 의견이 묵살되었고 자유당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가결하자 김영삼은 이에 환멸을 느끼고 동지들을 모아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 1970년대 들어 최초로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젊은 정치인인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제 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출처/한국역사연구회 홈페이지)

1970년대 들어 최초로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젊은 정치인인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제 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비록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으나 다음 해 실시된 제8대 총선과 제 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력을 회복했다.

그가 민주화의 상징으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는 1979년 10월 YH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정부인 유신정권에 대한 인터뷰이다. 유신 정권은 인터뷰를 빌미로 김영삼에 대한 의원직을 제명하고 총재직무를 정지시켰다.

이에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고조시켜 부마항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됐다. 10.26 사태가 일어나 유신정권이 붕괴되어 ‘서울의 봄’이 도래하자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하던 김대중 김종필과 정치활동을 전개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좌절됐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김영삼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이끌어냈다. 합당한 3당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 사정개혁과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정치 개혁을 시작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 국군보안사의 조직 축소와 명칭 변경,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이 시작됐다.(출처/MBN뉴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신한국 창조'라는 국정 지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사정개혁과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정치 개혁을 시작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 국군보안사의 조직 축소와 명칭 변경,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12·12사태와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수감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결단에만 의존해서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의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정경유착의 표본인 한보비리사건과 아들 김현철의 국정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사태를 초래하면서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 국회의원 최연소 타이틀과 최다의원 타이틀을 지닌 정치계의 거물인 김영삼 대통령. (출처/한국우표포털서비스)

국회의원 최연소 타이틀과 최다의원 타이틀을 지닌 정치계의 거물인 김영삼 대통령. 대통령이 되기까지도 많은 좌절과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녔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한 획을 그은 하나의 별이 졌다. 그의 서거를 계기로 진정한 민주화란 무엇인지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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