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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려는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 정책을 시행하였다. 때문에 많은 농사법들이 개발이 되거나 중국에서 들어오게 되었고 삼국시대보다 생산량이 급격히 늘게 되었다.

고려 전기의 농업 기술로는 수전 농법(논농사)을 이용하여 1년에 1차례 수확하는 ‘연작’과 1년에 1차례 이상 수확하는 ‘상경’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1년을 휴한하는 토지나 2년을 휴한하는 토지가 존재하여 불안정한 면도 있었다.

 

한전 논법(밭농사)는 1년에 1번 수확하는 연작이 일반적으로 수행됐으나 2년에 3작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근경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또한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 되면서 휴경기간이 단축되고 생산력이 증대됐다.

12세기 이후에는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상경법이 더욱 강화되었다. 수리시설과 간척 사업을 전개하였고 무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수경 직파법이 장착되어 갔다.

또한 초목을 발효하거나 인분(퇴비)를 사용하는 시비법, 답분법(밟기) 등의 방식도 널리 이용되어 생산성이 크게 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은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을 시작했는데 고려 정부는 봄 가뭄으로 인한 농사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이 많이 필요한 이앙법을 금지시켰다.

고려 원 간섭기에는 원의 사농사에서 농상집요가 편찬되었는데 충정왕 때 전래되어 우리나라 농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공민왕 13년에는 문익점과 정천익의 노력으로 목화 재배를 성공하여 백성들의 의복이 마에서 면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태조 2년에는 시전이 설치되어 도시민들의 생활품을 판매하고 관수품을 조달했으며 국고의 잉여품들을 처분하는 상설 어용상점(왕실과 국가의식의 수요품을 공급하는 상점)의 역할을 하였고 이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경시서라는 기구도 설치되었다.

지방에는 장시라는 오늘 날의 시장이 열렸는데 정해진 시기마다 하루거리 정도의 농민들이 모여 쌀과 포로 물물교환을 하는 형태의 상업이 행해졌다. 장시가 열리자 장시 사이를 순회하며 상행위를 하는 행상이 생겼으며 불교 사원도 쌀이나 각종 채소들을 적극적으로 판매하는 상행위를 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농업의 기술을 발전시켜 땅의 비옥도라는 개념을 처음 깨달은 시기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삼국시대보다 훨씬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생긴 잉여물로 백성들 사이에서도 상업이 발달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 태조의 중농 정책은 지난 삼국시대보다 한 단계 차원이 다른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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