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14세기 중반 원나라는 황위를 두고 권력 투쟁이 발생하여 단시간에 3명의 황제가 바뀌어 황실이 매우 어지러웠고 화폐를 남발하여 물가가 오르고 세금 역시 무거워져 백성들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이에 1351년 화북에서 발생한 홍건적이라는 대규모의 도적들의 난과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승려 출신의 주원장이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주원장은 1368년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하였으며 연호를 홍무라 지었다. 바야흐로 원나라는 몰락하고 새로이 명나라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중원의 패자가 바뀌면서 고려도 이런 국제 정세에 맞춰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고려는 홍무제가 명을 건국 한 뒤 북벌하여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몰아낸 뒤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친명반원(親明反元:명과 친하고 원을 멀리한다)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친명반원의 태도는 갖추었지만 공민왕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명의 사정을 틈타 북진의 의지를 계속 가지고 있었고 명나라 역시 고려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것을 우려하여 지속적인 압박을 시작했다.

1387년 원의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해 오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고려에게 사대와 함께 많은 공물을 요구했으며 심지어 1388년에는 고려가 원에게 탈환했던 철령 이북의 영토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장군은 명나라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명나라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맞서기 위해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했다.

 

우왕은 서경(西京:오늘의 평양)에서 5만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꾸렸다. 이에 최영을 총사령관 팔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그리고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았다. 그러나 정작 원정의 핵심이 되어야 할 최영은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던 아버지 공민왕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우왕의 요청에 의해 서경에 남게 되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원정군을 이끌고 음력 4월 18일에 출정하여 19일이 지난 음력 5월 7일에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으나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멈추고 14일을 머물렀다.

애초에 명을 치는 것을 반대하는 마음이 있었던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하여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夏月發兵),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다(擧國遠征, 倭乘其虛),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여 요동정벌 중단을 요구했다.

병력을 갖추고 있는 이성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온다고 하자 우왕과 최영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계속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이에 반하여 결국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매우 놀라 수도인 개경으로 급히 돌아가 반격을 준비했지만 음력 6월 3일 결국 개경은 함락되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최영은 고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성계는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세워 권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창건하는데 기초가 된 사건으로 한국사 전체에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고려왕조와 자신을 아끼던 최영을 배신하여 왕이 된 이성계, 희대의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기회를 놓치지 않은 능력자라고 할 수 있을까.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