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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는 궁궐이 불에 타는 등 왕권이 한없이 떨어져 있었다. 겨우 이자겸을 숙청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자겸이 형님의 나라로 화친을 맺어 놓은 금나라에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이자겸의 몰락 이후 고려는 경주 김씨인 김부식 등의 문벌 귀족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문벌귀족들에의 권력 집중에 대해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산세, 지세, 수세 등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묘청은 이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묘청은 정지상, 백수한 같은 신진 관료들과 함께 고려를 황제국으로 하는 건원칭제를 주장하였고 금을 정벌하자고 했으며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기운이 다해 내란과 외부의 침략이 심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묘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좋다며 서경(현재의 평양)으로의 천도(도읍을 옮김)를 주장하게 된다. 인종은 묘청의 주장에 설득이 되어 서경 행차, 관료조직의 감축, 불필요한 세금의 감면, 농사의 장려, 민생 안정, 질병 구제, 빈민 구제 등 15조에 이르는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또한 대화궁이라는 궁궐까지 지으며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금에 대한 정벌은 계속 반대했고 서경파들은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이렇게 서경파들이 천도에 성공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권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개경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김부식을 위시한 문벌귀족들의 반대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인종은 서경천도를 포기하게 되고 이에 극도로 화가 난 서경파들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서경으로의 천도를 성공시키고자 난을 일으키게 되는데(1135)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로 하며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하지만 묘청의 난은 결국 김부식이 지휘한 관군에게 서경이 함락되면서 진압되어 다시 문벌귀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묘청의 난은 고려 입장에서 반란으로 분류가 되기는 하지만 임금인 인종에 대한 난이라기 보다는 금에 사대하는 문벌귀족에 대한 반란으로 보는 것이 맞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이 난에 대해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풍수지리설 같은 토속신앙에 의지하여 난을 일으켰다며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한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모두 문벌귀족들의 오랜 집권과 폐쇄성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처럼 권력이란 웅덩이에 고인 물과 같다. 흐르지 않으면 썩기 때문이다. 고려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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