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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대 삼국시대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각국의 사는 모습들이 조금씩 달랐다. 이번 시간에는 고대 삼국시대의 사회상을 알아보도록 하자.

고구려는 북방의 산간지역인 압록강 중류 유역을 영토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을 ‘생산’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이라 쓰고 약탈이라 부른다)을 위해 군사력을 중히 여기는 사회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고구려의 상무적 기풍이라 하는데 이는 무예를 중시하고 숭상하는 경향을 말한다. 때문에 공부를 잘 하는 문관 보다는 무술을 잘 하는 무관이 더욱 높은 자리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상무적 기풍을 가진 만큼 죄를 지으면 엄격한 형벌을 내리곤 했는데 반역자는 화형을 처한 후 다시 목을 베었고 적에게 항복하거나 전쟁에 패한 자,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사람은 도둑질 한 물건의 12배를 배상하는 ‘일책십이법’을 시행하여 매우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이 전쟁 등에서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거두는 ‘형사취수제’와 데릴사위제인 ‘서옥제’를 실시했다. 평민들은 자유롭게 연애결혼을 했으며 신랑측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주는 정도로만 예를 표했고 신부 측에서 재물을 받으면 딸을 팔았다고 여겨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회상 역시 고구려를 매우 닮아 있었다. 상무적 기풍을 중시 여긴 것도 같았고 엄격한 형법을 운용했던 것도 비슷하다.

백제는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자는 목을 자르는 참형으로 다스렸고 도둑질한 자는 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배상하게 했다. 백제의 특이한 형법으로는 관인수재죄가 있었는데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하면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하는 벌이었다. 또한 다른 남자와 간음한 여자는 남편집의 노비가 되는 가부장적 사회를 반영하는 형벌도 있었다.

신라는 왕이 권력을 갖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어서 여러 부족의 대표가 함께 모여 정치를 하는 화백 회의를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귀족 문화가 발달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생긴 것이 바로 화랑도다. 화랑도는 씨족사회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됐으며 진흥왕(6세기)때 국가 조직화 되었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자제들인 화랑 한명과 교사로 지도하는 승려 1명, 6두품 이하 평민도 포함된 낭도로 구성되었었다. 화랑은 신라 사회를 이끌어갈 중견 인물을 양성하는 기능과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대립된 계급 간의 갈등을 조절하고 완호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화랑도는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내린 세속5계가 있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

으로 이는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를 크게 발전시키고 후에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신라는 골품제와 6두품이라는 신분제를 가지고 있어 근본적으로는 서로 경계하는 사회였다.

이처럼 고대국가의 사회 모습은 지역적인 특색이 많이 반영되었다. 북방의 거친 땅은 그곳의 사람들도 거칠게 만들었고 남방의 비옥한 땅은 각 지역의 세력을 강력하게 하여 중앙집권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특징을 이처럼 지역적 특색과 결부해서 생각하면 좀 더 그 시대의 이해를 빠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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