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멸렬한 진보개혁 진영

   손자(孫子)는 “똑같은 승리는 반복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투표일을 13일 앞두고 있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승패는 이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아직 오차 범위 내의 접전을 벌이고 있지만, 문 후보가 자력으로는 승리하기 어려운 판세라는 데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즉 안철수 전 후보의 적극적인 지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문 후보의 승리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안철수 전 후보의 지지가 있다고 해서 중립적 유권자의 표심이 반드시 문재인 후보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또한 문 후보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여론이 점증하고 있어 현재의 열세를 뒤집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안 전 후보의 일정한 지지가 있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적극적인 지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판단이 더 많다. 단일화 과정에서의 앙금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금년 초만 하더라도 야권으로의 정권 교체는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데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를 가동하고 당 이름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절체절명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패배,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디도스 공격 사건,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 등의 악재들이 쌓이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권 교체라는 대세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지난 4월의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였다. 총선에서도 민주당 등 야권의 승리가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새누리당은 그 내부에서조차 100석을 넘기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견해가 팽배했다. 하지만 민주당 후보의 막말 파문과 이에 대한 당 지도부의 부적절한 조치, 친노 중심의 공천 등 여론을 거스르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새누리당이 절반을 넘는 제1당의 지위를 다시 유지할 수 있었다.

   요컨대 야권이 연합 공천에 성공했음에도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새누리당에 참패한 제19대 총선이었다. 이것은 이대로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 미래가 없다는 우리 국민의 준엄한 경고였다. 그러나 야권은 10년 전인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향수에 젖어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말하자면 야권이 뭉치기만 하면 다가오는 12월 대선에서 새누리당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나머지 민심의 경고음을 무시했다.

   총선 후 위기는 새누리당에 먼저 찾아왔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공천 헌금 의혹 사건이 그것이다. 또한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특권 폐지를 약속해 놓고도 자당 소속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는 모순을 저질렀다. 그리고 대선 후보 경선 규정을 놓고 후보들 간에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권 심판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국민의 기대에 반하는 일들이 연발함으로써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은 물 건너가고 있다는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야권에도 위기의 징후가 나타났다. 바로 통합진보당 사태이다. 국회의원 후보 선출 과정에서 부적절한 일들이 있었고, 이 일로 계파 간 권력 투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언필칭 진보 정당이라 자처하는 통합진보당의 구태의연한 모습을 그들 스스로 세상에 폭로한 셈이다. 결국 추한 꼴을 다 보여주면서 ‘통합’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분당(分黨)의 길로 가고 말았다. 통합진보당과 대선 연대를 해야 할 민주당으로서도 예감이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야권에는 안철수라는 장외 기대주가 버티고 있었다. 일시적인 여론의 등락에도 불구하고 안 전 후보를 야권으로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금년 대선은 해 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야권 내에 충만해 있었다. 실제로 여론의 추이도 대개 야권에 유리했다. 만일 야권 단일화가 안 전 후보로 귀결되었거나,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당초의 예상처럼 시너지 효과가 커져 지금쯤 야권이 승기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 너무나 당연한 승리 방정식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첫 신호탄은 문재인 후보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일이었다. 문 후보는 훌륭한 품격의 소유자이지만, 대통령이 되기에는 정치 경륜이나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거기다 친노 핵심이란 점이 부담이 될 것이라는 당 안팎의 걱정이 만연했다. 하지만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 세력은 ‘어게인 2002!’를 외치며 친노 적자(嫡子)인 문재인 후보를 선출했다.

   이들은 총선 직전에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친노인 한명숙 대표 체제를 출범시키고 제18대 총선 공천을 주도했다.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도 역시 자파의 이해찬 대표를 창출했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위한 토대를 완성했던 것이다. 그 결과 문 후보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쉽사리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야권 후보 단일화도 패권주의의 틀에서 접근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문 후보로의 집권이란 당위성은 흔들릴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야권 후보 단일화가 무산된 배경이다. 친노 세력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신들의 명예 회복을 꿈꾸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재집권욕은 정권 교체를 바라는 야권 지지자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상식적으로는 승리 가능성이 높은 안철수 전 후보에게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들은 차기 권력의 요직을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10년 전의 성공 경험에 매혹되어 그 상식을 뛰어넘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친노 패권주의 때문에 야권 후보 단일화는 깨졌다. 안철수 전 후보의 권력의지가 비교적 약하고 세력 또한 미미했다는 점에서 어떤 단일화 경쟁 규정을 도입하든 문재인 후보의 승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친노 세력은 일말의 우려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0년 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정권 재창출을 위해 과감하게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했던 경험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제 개인기 면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밀리는 문재인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야권의 대동단결뿐이다. 그러나 벌써 안철수 전 후보 쪽의 일정한 이탈이 있는 데다 민주당 안에도 친노 패권주의 때문에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강하다. 그렇다고 문 후보가 안 전 후보 쪽을 포함한 야권 전반을 포용할 만큼 정치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다. 그래서 야권 지지자들이 ‘정권 교체’를 외치며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야권의 지리멸렬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친노 패권주의와 부적절한 후보의 선출, 야권 후보 단일화의 사실상 파기에서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이라 통칭되는 야권이 진보 혹은 개혁 이미지와 동떨어진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야권 역시 새누리당과 함께 패권주의, 독선주의, 부정부패 등 시대착오적인 낡은 요소들을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야권 일각의 종북주의라는 그림자는 진보 정치의 존립 기반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민주당에도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종북주의는 불행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부산물이지만, 표를 얻겠다는 정당이라면 반(反)국민적인 노선을 이미 폐기해야 했다. 대한민국 진보·개혁 진영의 미래를 위해서도 자기청산이 불가피했지만, 그들은 끝내 살아남았다. 무슨 염치인지는 몰라도 대선 후보까지 내세워 야권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

   정권 교체는 시대적 명제라고 강변하는 야권이 스스로의 개혁은커녕 구태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걷어찬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따지고 보면, 박 후보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갖고 있고 오랫동안 국민의 관심을 받아 온 정치인이지만, 시대 흐름으로 볼 때는 불리한 면도 있다. 새누리당의 이미지도 그렇다. 그럼에도 박 후보에게 패하기 일보 직전으로 내몰린 야권은 참회록을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라고 했다. 오만과 독선으로 정권 교체라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야권 주도 세력은 거듭 태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견지해 온 관성과 관념과 기득권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존재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꼭 안철수 전 후보 진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참 진보·개혁 정당이 들어서지 말라는 법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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