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홈런왕이었던 베이브 루스(Babe Ruth)는 “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1루, 2루, 3루 베이스를 차례로 밟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다. 또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기적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유대 속담도 있다. 안철수 후보의 전격 사퇴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말들이다.

   필자가 누차 지적한 대로 안철수 후보의 사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안철수의 길’이 아닌 ‘남의 길’에 끌려들어간 순간, 그의 사퇴는 예정된 수순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후보 단일화 따위는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한 채 민주당이 쳐 놓은 단일화의 덫에 갇히면서 자신의 입지를 스스로 좁힌 결과이다. 말하자면 새 정치의 깃발을 들고 신진기예들과 함께 당을 만들어 총선에도 참여하고 이번 대선에도 뛰어들어야 했다.

   만일 야권 후보 단일화에 참여할 의향이었다면 늦어도 금년 초에 민주당에 입당하여 비례대표라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그 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어야 했다. 아무리 대한민국 정당 정치가 허약하다 하더라도 단기필마의 무소속 후보가 제1야당 후보와 겨루어 이길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한 일이었다. 요컨대 포지셔닝의 실패로 승리는커녕 도중하차라는 불명예를 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지난 1년 동안 유권자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후보 단일화라는 이벤트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여기에는 안철수 후보의 실책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의 지나친 당리당략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제1야당 후보가 단기필마의 무소속 후보와 자잘한 단일화 룰을 놓고 지나치게 버틴 것은 두고두고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안 후보의 사퇴를 재촉한 장본인은 문 후보와 민주당인 것이다.

   이로써 ‘아름다운 단일화’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겠다는 야권의 기대는 처절히 무너졌다. 문재인 후보의 경쟁력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닌 데다 안철수 후보가 문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 없다는 점에서 정권 교체라는 당면 목표에 적신호가 켜져 있다. 상호간의 신뢰가 돈독했다면 안 후보의 도중하차라는 최악의 사태는 발생할 수 없었다.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오로지 권력욕에만 혈안이 된 추태만 연출한 꼴이다.

   비록 안철수 후보가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지 못했지만, 그의 등장 자체는 너무나 신선했다. 정치 혁신이라는 시대적 소명 또한 뚜렷했다. 이런저런 요인으로 안철수 후보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제2, 제3의 ‘안철수 현상’은 또다시 등장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낡은 정치 체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 제아무리 정치 혁신을 말하더라도 그 실천은 기대하기 어렵다.

   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이번 대선은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대전(大戰)이다. 이 구도는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대로 ‘과거 대(對) 과거’의 싸움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의 대결’인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보수 진영’ 대(對) ‘진보·개혁 진영’의 총력전이다. 말하자면 역대 선거에서는 보기 드문 완벽한 진영 사이의 대결이다.

   윈스턴 처칠은 “과거와 현재가 싸움을 벌인다면 미래를 잃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방금 언급한 이번 대선의 특성으로 볼 때 ‘미래 비전을 향한 경쟁’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야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을 벼르고 있어 더 더욱 싸움의 양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기승을 부렸던 네거티브 캠페인 혹은 흑색선전, 막말 파문 등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재현될 공산이 큰 것이다.

   필자가 안철수 후보의 사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정당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을 놓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거전이 치졸한 방향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안 후보가 독자 후보로 완주하거나 야권 단일 후보로서 참여를 하면 진흙탕 선거를 어느 정도 제어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는 오차 범위 내 접전이기 때문에 이번 대선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으로 비화할 것이다.

   두 후보 중에서 어느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지 모르겠지만, 이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패배한 쪽은 심정적으로 승복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야권이 패하면 4년 전 촛불 시위에서 경험했듯이 사사건건 정부와 여당에 반기를 들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외 상황이 여의치 못한데, 극단적인 대결이 펼쳐지면 당면 과제인 국민 통합은 물론, 정치·경제·사회적 비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중에서 대한민국의 다음 5년을 책임질 대통령이 나올 예정이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두 후보의 자질에 대해 보다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각 언론 매체들이 그동안 단일화와 관련한 보도에 치중하는 바람에 후보 검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충분한 검증이 가능할지 걱정스럽다. 방송 토론이 어느 정도 양 후보의 비교우위를 점검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양 후보에 얽혀 있는 불미스러운 일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대통령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인 통찰력과 소통 능력, 조정 능력, 위기관리 능력을 잘 구비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다음 대통령과 국정을 함께 할 여당과 참모진의 역량이다. 역대 정권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여당과 참모진이 그렇지 않으면 국정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언론이 다시 파헤치지 않더라도 문재인 후보 쪽으로부터 거친 공세가 예상된다. 수직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어떻게 해명할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몇몇 측근이 좌지우지한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박 후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주창하고 있는데, 그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여성 리더십의 장점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를 답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은 새누리당의 혁신이다. 웰빙 정당, 부패 정당, 꼰대 정당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새누리당을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박근혜 정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새누리당에 대한 혁신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이를 최대한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문재인 후보는 자신에게 쏠린 부산저축은행 의혹에 대해 분명히 밝혀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핵심 실세로서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초미의 관심사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있었던 NLL 발언 논란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할 대상이다. 무엇보다도 초선 의원에 불과한 짧은 정치 경력을 상쇄할 만한 내공과 경륜의 소유자인지를 밀도 있게 점검해야 한다.

   민주당 역시 새누리당과 더불어 낡은 정치 체제의 주역이다. 새누리당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공히 지역 정당, 부패 정당, 밀실 정당이라는 오명(汚名)으로 불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족주의 혹은 남북 평화라는 이름 아래 북한 체제를 지나치게 감싸거나 저자세를 보이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를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여류 소설가였던 마리 폰 에브너 에센바흐(Marie von Ebner-Eschenbach)는 “당당하게 받아들인 패배도 승리다.”라고 했다. 안철수 후보는 비록 유종의 미(美)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정신과 아름다운 양보만큼은 국민들 가슴 속에 남을 것이라 믿는다. 안 후보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정치 혁신은 중단될 수 없는 과업이다. 이번 대선 이후에 정치 혁신을 향한 또 다른 움직임이 태동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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