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가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Andre P. G. Gide)는 “익숙한 해변에서 눈을 뗄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낡은 관행과 구태의연한 사고로는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더욱이 시대 흐름이 급속히 달라지는 요즘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번 제18대 대통령 선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뭐니 해도 정치 혁신이야말로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싶다. 국가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것들을 풀어야 할 주체는 정치권이고, 정치권의 지체 현상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 혁신은 해묵은 숙원이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기대가 가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안철수 현상’ 때문이다. 안 후보를 통해 정치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는 국민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설령 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더라도 정치 혁신을 모토로 출사표를 던진 일만으로도 기존의 낡은 정치 체제를 바꾸는 데 기여하리라는 전망이 많았던 것이다.

안철수 후보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새누리당과 민주당 등 기존 정당들은 낡은 체제임이 분명하다. 이 정당들에게 자기 개혁의 길이 전혀 차단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 정당 정치의 위기 자체가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기득권자들이 각 정당을 대표하고 장악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깊고도 넓었는데, ‘안철수 현상’과 함께 이것이 가능하겠다는 믿음이 싹터 왔다. 기존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가운데서도 새로운 대안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마지못해 관성적으로 그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지 그 정당이 좋아서 지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봐야 한다.

요컨대 도저히 고쳐 쓸래야 쓸 수 없는 골동품에 불과한 기존 정치권이기에 안철수 후보라는 새로운 상품에 거는 기대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좀처럼 사람 이름이 붙는 어떤 현상은 없는데, ‘안철수 현상’이 거의 유일한 사례일 만큼, 국민적인 기대는 지대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길은 자명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안철수 현상’은 단순히 안철수 후보 개인에 대한 열광이 아니다. 안 후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다. 그 요청은 이런저런 정치공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염원의 응집이라 할 수 있다.

안철수 후보는 처음부터 ‘안철수의 길’은 야권의 후보 단일화와 같은 얄팍한 정치 술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선을 그었어야 했다. ‘스스로 말한 낡은 체제와 손을 잡는 것은 모순’이라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낡은 체제와의 동거는 안 후보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싹을 죽이는 음모에 불과한 것임을 선언했어야 했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는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나머지 패배를 자초하고 있다. 낡은 체제와의 연대로 대통령 선거에서 안 후보가 최종 승자로 등극하더라도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니다. 낡은 체제의 연장에 안 후보가 기여하는 의미밖에 없다. 기득권 정치에 둘러싸여 얼굴 마담 이상의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사실, 이런 양상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무엇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새 정치’라는 깃발은 사라지고 오로지 승리에 목마른 기성 정치인의 모습만 연상되고 있다. 개혁가에서 노회한 정치 공학의 대가라는 이미지로 변질되고 있는 지경이기도 하다. 그런 오해를 자초할 만큼 정체성이 모호하다.

문재인 후보 측의 언론 플레이에 대한 불만으로 단일화 협상을 잠정 중단한 것을 두고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이런 행태를 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아니면 단일화를 유리한 방향으로 끌기 위해 샅바싸움을 하는 것이라면 정치공학에 능하다고 해야 한다. 그 어느 쪽이든 안철수 후보의 입지는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라고 했다. 지금 안철수 후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타박했던 기존 정치인들을 시나브로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 후보는 과연 자신의 무엇이 기존 정치권 혹은 박근혜-문재인 후보와 다른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캠페인 방식도 별반 다를 바 없고, 정치 혁신 내용도 그렇다. 과연 서울대학교 원장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 만큼 준비를 제대로 했는지도 의문스럽다. 물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정치 혁신안도 별 게 없다. 모두가 대동소이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혁신을 고리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안철수 현상’이라는 태풍이 사그라질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걸 되살리는 길은 안 후보 스스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시대와 국민을 믿고 뚜벅뚜벅 제 길을 가야 한다. 후보 단일화는 자신의 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비전으로 독자적인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럴 때만이 안 후보의 입지가 넓어지고 대세를 장악할 수도 있다.

어차피 안철수 후보가 독자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정치 혁신의 꿈은 하루아침에 실현되기가 어렵다. 보다 긴 안목으로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대선의 승패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이번 대선을 하나의 계기로 삼아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백년대계의 포부로 국가적 대업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

처음부터 이런 자세로 나갔다면 3파전에서도 1등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기존 정치권이 견고하다 하더라도 태풍에 견딜 기존 정당은 어디에도 없다. 그 태풍, 일본 말로 쓰나미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거기에 힘을 보탤 준비를 하고 있던 유권자들이 실망한 나머지 서서히 발을 빼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만일 안철수 후보가 실패한다면 대한민국 정치의 시계는 거꾸로 가거나 2012년 12월 19일로 멈춘다는 의미이다. 설령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리더십이 뛰어나더라도 이들을 둘러싼 정치 세력이 대표적인 기득권 집단이기 때문에 낡은 체제의 지속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정치를 넘어 대한민국 기득권의 연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금년 대선 이후 이기는 쪽이나 지는 쪽이나 정치 혁신의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혁신안은 구두선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스스로 혁신을 해내기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이 너무 달콤하다. 몇몇 용기 있는 개혁파들이 정치 혁신을 강하게 요구하겠지만, 기득권을 밀어내기에는 아직 힘이 미약한 편이다.

따라서 이 정당들의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안철수 후보의 역할이 중요하다.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말하자면 ‘정권 교체’가 아니라 ‘세력 교체’ 혹은 ‘체제 교체’라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안 후보가 후보 단일화를 통해 승리한다 해도 이것은 ‘안철수의 길’이 아닌 ‘안티철수’의 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안철수 현상’을 스스로 망각하고 있는 안 후보가 명심해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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