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문명의 충돌』(1996년)로 유명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Phillips Huntington)은 2004년에 『미국』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 위기를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필자는 오래 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접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즉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 요인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오랜 세월 빈곤과 압제에 주눅 들어 있던 많은 국민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지금도 상당수 우리 국민은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다. 이런 국민 정서는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것이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Winston L. S. Churchill)은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는 축복을 불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회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는 비참함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모두가 적자생존의 사회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압축 비약 성장에서 오는 여러 가지 불법과 탈법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데다, 언제부터인가 정글 자본주의의 원리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도 냉혹한 사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헌법 여기저기에서 망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조항이 제11조 1항이다. 즉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이다.

그러나 당위와 현실이 많이 다르다는 걸 우리는 몸소 경험하고 있다. 우선, ‘법 앞의 평등’이란 원칙부터 실종되었다. ‘유권무죄 무권유죄’란 말이 횡행한 지 오래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은 극심하다. 계층 상승은 제도적으로 열려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마디로 불평등 사회이고, 불공정 사회이다. 물론, 경쟁 사회에서 불평등과 불공정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정도가 문제이다. 상당수 국민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의 불평등과 불공정 현상에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층 간 격차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20대(對) 80 사회’에서 이제는 ‘5대(對) 95 사회’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이다. 중산층 붕괴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중산층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중산층이 튼튼해야 합리적인 여론 창달이 가능하고, 사회 갈등의 완충지대가 생길 수 있다.

둘째, 지역 사이의 간극이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지방의 경제적·교육적 기회의 차단은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하고 있다. 수도권의 집중과 지방의 황폐화는 이중적인 부담이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도입된 지방자치제는 허울뿐이다. 온전한 지방자치제를 가로막는 주요인 자체가 지역 간 수준의 격차이다. 따라서 산업 정책과 국토 정책의 근본적인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셋째, 지역감정이다. 필자는 며칠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필자의 지인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본적을 바꾸었다고 한다. 특정 지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원래의 본적으로는 기업체 취직이 잘 안 된다는 이유였다. 공직 사회의 풍토 역시 이와 비슷하다. 오죽하면 고당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이런 말을 남겼겠는가. “고향을 묻지 말자. 그리고 우리가 고국에 돌아가서도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하자. 인화와 단결이야말로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나라가 독립을 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넷째, 학벌 사회의 그림자이다. 대한민국에서 학력은 일종의 ‘주홍 글씨’이다. 고등학교는 특목고와 여타 학교로 양분되어 있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와 다름없다. 이게 어찌 평준화 제도인가. 고액 입시학원으로 전락한 특목고는 폐지되어야 한다. 대학도 철저히 서열화 되어 있다. 고교와 대학이 계급(등급)화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특정 대학과 그 출신들이 기회를 독과점하는 구조는 학벌 사회의 가장 큰 폐단이다.

다섯째, 세대 간 단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시대 흐름이 너무 빨라서 세대 단절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세대 사이의 ‘역사적 체험’이 너무 다르다. 노·장년 세대는 빈곤을 이겨낸 세대이다. 반면에 중년 세대는 민주화의 거센 파고를 겪었다. 청년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열매를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더 살벌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인식과 입장의 차이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놓고도 제로섬 관계에 있다.

불평등과 불공정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요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물신주의와 경쟁지상주의의 만연이다. 가난이 뼈에 사무쳐서인지 물신주의가 팽배하며,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에는 사회 전반이 경쟁지상주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심지어 공공 부문과 학교마저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효율성이란 미명 아래 공동체 정신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열세 부문의 자연도태임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둘째, 부조리 네트워크이다. 우리 사회는 연고주의가 강하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 하더라도 뿌리를 찾는 일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문제는, 이 연고주의가 거대한 부조리 네트워크로 변질되어 있다는 점이다. 꼭 학연이나 지연이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인연으로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는 접대 문화는 부조리 네트워크의 표본이다. 어떤 식으로든 인맥의 강도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기득권의 헤게모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또한 권력은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국가-기업-시민사회 등으로 파워 블록이 나뉘어져 있다. 민주주의의 주요 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전혀 다르다. 기득권의 헤게모니 때문이다.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부문이 기득권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통령이 동반 성장을 아무리 외쳐도 잘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넷째, 정치적 대표성의 편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정당들이 공존하고 있지만, 주요 정당들은 모두가 기득권을 대변한다. 민주당은 요즘 들어 부쩍 ‘좌 클릭’을 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기득권에 가깝다. 진보 정당들은 힘이 약할 뿐만 아니라 분열되어 있고, 대체로 낡은 관념과 습속에 빠져 있다. 요컨대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대변할 정치 세력은 별로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이 대한민국의 불평등과 불공정 구조는 대단히 견고하다. 그래서 이 철벽을 깨뜨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는 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또 역사는 일직선으로도 흐르지만, 때로는 나선형(螺旋形)처럼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특정 관념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겠다는 발상은 곤란하다. 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중대한 전환점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국가를 형성하는 데에는 천년의 시간도 충분하지 않지만,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데에는 한 시간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를 형성한 지 겨우 6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분단국가라는 점은 차치하고 대한민국의 내부만을 들여다보더라도 국가적 정체성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대한민국이란 국가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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