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좌),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 (우)

 

프랑스혁명사에는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싸운 사회운동가이다. 1793년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여성 지도자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기뻐하며 옹호했다. 하지만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자 <여성인권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일이 단죄의 빌미가 되었다. 그는 처형되기 직전에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20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가슴 절절한 금언이 아닐 수 없다. 그때와는 현격할 정도로 여성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돌이켜보면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오랜 여성 암흑의 세월이었다. 여성 참정권만 하더라도 1893년에 이르러서야 뉴질랜드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영국은 20세기 들어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제는 ‘여성 대통령’이란 단어조차 어색하지 않으니,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실제로 유명하거나 뛰어난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거렛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전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전 미국 국무장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여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주지하듯이 여성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근육노동을 주축으로 하는 농경 사회와 산업 사회가 남성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지식 인프라를 잘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경쟁의 대열에 뛰어들 수가 있다. 나아가 작금의 감성 시대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을 더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각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활약상은 눈부시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 역시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지만, 정치권에서도 여성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추세이다. 이미 8년 전부터 비례대표는 최소한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하고 있다. 여성 지역대표 국회의원들의 숫자도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나는 경향이다. 질적으로도 눈부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여성만 해도 세 명이다. 이 밖에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여성 정치인들은 결코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제1당이자 여당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야말로 가장 주목되는 여성 정치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 후보는 이미 50대 초반이던 2004년에 제1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것도 당이 절체절명에 처했을 때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당을 살려냈다. 그리고 지금은 유력 대통령 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다. 여전히 성(性) 차별이 근절되지 않은 우리나라이지만, 그래도 세상이 많이 바뀐 걸 실감할 만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관전 포인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여성 대통령’의 탄생 여부도 중요한 요소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지금은 ‘여성 국회의원’이 흔한 현상이지만, 8년 전까지만 해도 매우 드물었다. 특히 5년 전의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라는 말이 회자되곤 했다. 박근혜 후보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석패한 것을 두고 그런 뒷말이 나왔다.

박근혜 후보는 언젠가 ‘여성 대통령은 시기상조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는 늘 고정관념을 타파하면서 발전해 왔다.”라고 답변한 바 있다. 박 후보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역사는 고정불변한 게 아니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통령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대한민국에도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셈이다. 또한 여성 대통령의 등장만으로 여성의 지위 수준을 재단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단계가 상승하는 데 상징적인 계기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박근혜 후보 측에서도 최근 들어 은근히 ‘여성 대통령’을 전파하고 있다. 부드럽고 섬세하며 자애로운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박 후보의 정체성은 여성 정치 지도자에 머물지는 않는다. 여성이라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뽑힌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가 먼저 연상되지도 않는다. 특유의 미모를 자랑하지만, 위기 때마다 역량을 발휘하고 카리스마가 만만치 않아 이런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권위주의라는 인상도 이에 일조하고 있다.

게다가 반드시 여성들이 선호하는 후보라고 할 수도 없다. 두 가지 면을 다 갖고 있다. 여성들 중에서는 ‘아직 여성이 대통령을 하기에 이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그 반대의 정서도 적지 않다. 게다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역, 계층, 연령, 직업, 소속 정당 등 다원적 정체성의 교차에 따라 투표 성향이 좌우되기 마련인 것이다.

‘여성 대통령’에 못지않은 관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대(代)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지금은 오히려 후자가 전자보다 더 부각되어 있다. 그만큼 박 전 대통령은 ‘뜨거운 감자’이다. 박 후보의 당선 여부에 따라 양 극단에 치우쳐 있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의 분포가 달라질 수도 있다. 박 후보도 내심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제33주기 추도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는 국민께 돌려 드리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또 “아버지에게는 그 당시 절실했던 생존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자 철학이었다.”라고 하면서 “그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와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고 덧붙였다.

종전과는 달리 대체로 균형 잡힌 발언이다. 따지고 보면, 이 시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야권에서는 박 전 대통령 시절의 부정적인 일화들을 애써 각인하려 하겠지만, 이미 진부한 주제가 됐을지도 모른다. 다만,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과 리더십은 이와 별개로 중요한 관찰 대상이다.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의 향후 5년은 박 전 대통령의 시대가 아니고, 박 후보의 시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근혜 후보의 리더십을 세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이미 다 알려져 있다. 필자 역시 숱하게 언급했다. 핵심은 박 후보의 리더십이 시대에 적합한지의 여부이다.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 시대 흐름에 맞는 가치관과 소통 방식 따위 말이다. 이것만 보고 투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이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박 후보는 시대성에서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박근혜 후보는 ‘여성 대통령’을 운운하기 이전에 이 주장이 가능할 정도의 시대정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 적어도 웹(Web) 2.0 시대의 가치인 ‘개방·참여·공유’에 부합하는 지도자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여성’이라는 특징은 아무런 장점으로 작용할 수가 없다. ‘여성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취지인데, 박 후보의 리더십이 새롭지 않다면 그 슬로건은 한낱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월간『신동아』 2007년 5월호 인터뷰에서 “아베(아베 신조) 총리는 변화구를 던질 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이 언제나 한결 같으면 질려 버린다.”고 일갈했다. 박근혜 후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한다면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즉 식상함이다. 일신(日新)우일신(又日新)하지 않으면 적어도 이번에는 ‘여성이 청와대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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