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VS 미래

 

독일의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각 시대에는 각기 그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의해 인류는 진보한다.”고 설파했다. 전환기 대한민국에 잘 들어맞는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또 국가 경영을 꿈꾸는 대통령 후보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별칭과는 달리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영토의 변경이나 피의 섞임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덜한 편이지만, 숱한 수난과 고비를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우뚝 서는 기적을 연출했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는 주지하듯이 극단적인 추락과 도약을 함께 겪었던 굴곡 많은 세월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사의 기점인 8·15 해방 이후 67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의 포로가 되어 있다. 우선, 8·15 해방이 민족 분단의 계기가 되었고, 그 분단 체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로부터 파생된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과 입장이 상반되는 두 진영이 충돌하고 있어 과거는 현재진형행의 성격을 띠고 있다. 비유컨대, ‘1948년 체제’의 지속이다.

진영 간의 격돌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부터, 아니 그 이전인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부터 싹텄다. 그걸 서구처럼 좌·우파라는 잣대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전선을 넓히면 민족 대(對) 반민족, 반체제 대(對) 체제, 민주 대(對) 반민주의 구도로 볼 수도 있다. 기존의 두 진영을 한통속으로 묶고 그 반대편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진영을 상정한다면, 안철수 후보의 말대로 비상식 대(對) 상식의 구도로 관찰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얽혀 있어 해법이 복잡하기 짝이 없다.

흔히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망적 투표’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지나간 일을 따지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국가 공동체나 개인의 미래를 위해 투표한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에서는 ‘회고적 투표’ 성향이 높다고 말한다. 정권에 대한 중간 심판의 특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원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통령 선거에서도 전망적 투표와 회고적 투표가 교차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번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과거사가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먼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은 박 후보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순리대로 풀지 못한 결과 이슈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박 후보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던 5년 전에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진영 안에는 박정희 정권 때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새누리당이라 하면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새누리당은 오랜 집권 세력으로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함께 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광보다는 치욕이 더 돋보이기 마련이라 과거사에 관한 한, 새누리당은 수세에 내몰리기 쉬운 운명이다. 그래도 박근혜 후보를 선출했기 때문에 더 증폭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사가 오늘의 시점에서 크게 부각되고 있는 데는 그걸 통해 존재이유를 입증하고자 하는 세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정치를 바꾸려면 새누리당을 한국 정치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이 후보는 “우리 민중은 유신 독재의 퍼스트레이디가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는 일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의 설득력 여부를 떠나, 진보 진영을 분열시키고 곤란하게 만드는 데 공이 큰 이정희 후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 후보의 발언은 자신과 통합진보당의 궁색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즉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정반대 편의 세력을 무분별하게 공격함으로써 찾는 꼴이다. 이 후보와 같은 언행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그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우적 분파가 시대착오적인 사이비 진보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른바 ‘적대적 공존’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주류 진영은 악(惡)이고 그 반대 진영은 선(善)’이라는 도식은 성립될 수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주류 진영이 매를 더 많이 맞을 수밖에 없지만,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대혼란, 6·25 전쟁, 1980년대 운동권 일각의 급진 좌경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종북주의 등 비주류 진영의 잘못도 적지 않다. 또 도덕적 하자와 낡은 행동양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다수의 정치·운동 세력이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오류들의 책임을 주류 진영에게 전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두 진영 모두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먼 과거의 일은 아니지만, 노무현 정권 때의 일을 놓고 다투고 있는 양상도 이번 대선이 미래 비전을 향한 경쟁이 아닐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어려운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석연치 않은 공세를 펴고 있는 박근혜 후보 측이나, 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문재인 후보 측이나 피장파장이다. 이처럼 이번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과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 맞붙고 있는 형국은 대한민국 현대사가 낳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가진 개인적인 리더십에 관계없이 이번 대통령 선거가 박정희 대(對) 노무현의 싸움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산업화의 상징인 박 전 대통령과 민주화의 상징인 노 전 대통령의 대결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거 대(對) 과거’의 경쟁일 뿐이다. 여기에 기존 정당들을 ‘낡은 체제’라고 규정한 안철수 후보가 맞서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미래를 강조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과거형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지식정보 시대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고 있는 안철수 후보의 존재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안 후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쉽지만은 않다. 박 후보와 문 후보 뒤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새누리당과 민주당이라는 거함이 버티고 있다. 일엽편주에 불과한 안철수 호(號)가 낡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막강한 이 거함들을 격침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사람들은 흔히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미래를 말한다. 하지만 과거의 향수가 그리운 사람이거나 현재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사람은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미래를 선호하지 않는다. 안철수 후보가 그런 위치에 처해 있다. 현재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많지만, 과거 또는 현재에 집착하거나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냥 현재가 편한 유권자 층으로부터는 아직 확고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은 안철수 후보의 리더십에서도 연유한다. 안철수 후보가 국정 경험이 부족하고 함께 할 정치 세력이 불확실하다는 인식 때문에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 중에는 안 후보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는 정서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 후보 스스로 참신하되 통찰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안 후보의 급부상이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민심 이반에서 비롯되었다면, 대안으로 안착하려면 그 이상의 능동적인(positive)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미래 대(對) 미래’의 경쟁이냐, 혹은 ‘과거 대(對) 과거’의 구도냐, 아니면 ‘과거 대(對) 미래’의 싸움이냐가 가장 주목되는 키포인트이다. 가장 불행한 선택은 ‘과거 대(對) 과거’의 선거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구도에서 탄생하는 대통령은 또다시 실패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역시 최선의 대안은 ‘미래 대(對) 미래’의 선거전이다. 미래를 향한 비전의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전환기에 처해 있는 대한민국에 ‘희망의 봄’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권이 전반적으로 과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주소는 미래 비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준비하는 유자격의 정치 세력이 거의 없다는 걸 방증한다. 과거사에 대한 과도한 공방에 얽매이거나 기득권에 연연하는 이유는 권력 쟁취 욕구에 비해 국가 경영을 할 만한 역량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세울 만한 강점이 별로 없어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거나 기존의 습속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도착(倒錯) 현상은 보수 정당, 중도 정당, 진보 정당 모두에 해당되는 일이다.

사회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역사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할 수가 없다. 또 과거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 하지만 과거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그러다가는 영영 미래를 맞이할 수 없다. 아울러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더라도 독단적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하려는 역사주의의 함정을 경계하지 않으면 하이네가 말한 진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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