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장학회는 대형 이슈가 될 것인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인간의 생활이나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한 순간의 일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괴테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향방을 결정할 대통령 선거에서도 순간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소한 실수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어제(21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정수장학회 논란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회견에서 박 후보는 야당의 주장을 정치 공세라고 반박하면서도 최필립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진의 자진 사퇴를 사실상 요구했다.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는 공익재단이며 어떠한 정치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장학재단”이라며 “저의 소유물이라든가, 저를 위한 정치활동을 한다는 야당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게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김지태 씨가 헌납한 재산에 국내 독지가뿐 아니라 해외 동포까지 많은 분의 성금과 뜻을 더해 새롭게 만든 재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후보는 “김지태 씨는 4ㆍ19 때부터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5ㆍ16 때 부패 혐의로 징역 7년을 구형받는 과정에서 처벌받지 않기 위해 재산 헌납의 뜻을 밝혔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 등을 헌납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박근혜 후보는 “이사장과 이사진은 정수장학회가 더 이상 정쟁의 도구가 되지 않고 국민적 의혹이 조금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확실하게 투명하게 밝혀서 해답을 내놓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어려운 학생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셨던 것도, 제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것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이사진은 장학회 명칭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잘 판단해주셨으면 감사하겠다.”고 부연했다.

이 기자회견은 당초의 예상을 빗나갔다. 박근혜 후보가 정수장학회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진다고 예고했을 때만 하더라도 지난 번 과거사 회견처럼 법원의 판결 내용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이사장의 자진 사퇴를 호소하는 방향일 것이라 전망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회견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타난 회견 내용은 ‘회견을 왜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강도가 높았다.

게다가 박근혜 후보는 어제 회견에서 김지태 씨의 재산 헌납 과정에 강압이 없었다고 얘기했다가 나중에 이를 번복했다. 박 후보 스스로 사실관계 파악이 미흡하다는 방증인 것이다. 또 박 후보가 2005년 이사장 사퇴 후에는 자신이 정수장학회와 관련이 없다고 하면서도 이사장 등 이사진의 거취를 표명한 대목도 시비 거리이다. 더욱이 최필립 이사장은 곧바로 사퇴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박근혜 후보가 예상 밖의 내용으로 응수함으로써 야권 및 이해당사자들과 진실 공방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쌍방 간에 자존심 대결은 물론, 정수장학회 문제가 이번 대선의 주요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박 후보의 강경 대응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의 인권 탄압 이슈는 박 후보 자신이 개입한 일이 아니라서 사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 후보가 이사장을 지낸 장학회 문제는 이와 다르다.

정수장학회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지도 모른다. 설령 정치권력의 강압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진 헌납의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압이 개입했을지라도 권력이 사적인 목적으로 편취를 한 사유 재산은 아니다. 공익재단이자 순수한 장학재단이라는 주장에 수긍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지태 씨 유족의 입장에서는 비리가 있었든 없었든 권력으로부터 사유 재산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정수장학회 논란의 핵심은 ‘강압에 의한 반(半)강제적 헌납’이냐 아니면 ‘자진 헌납’이냐이다. 그리고 정수장학회가 김지태 씨의 부일장학회와 별개의 것이냐의 여부도 쟁점이다. 이런 논란들에 대해서는 김 씨 유족 및 법원의 판단과 박근혜 후보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법의 잣대를 떠나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사실 여하를 떠나 당시의 정세를 감안할 때 여론은 전자 쪽에 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공자(孔子) 선생은 “사람은 바위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더지가 쌓아놓은 흙덩이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바위와 같은 큰 걸림돌이든 아니면 흙덩이에 불과한 작은 걸림돌이든 박근혜 후보에게는 악재임이 분명하다. 어제의 강수가 적절했는지의 여부는 앞으로 나타날 대선 판세에 달려 있다. 한 가지 가능한 전망은 야권 성향의 유권자들이 결집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는 점이다.

정수장학회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박근혜 후보가 5년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든 본선에서든 경쟁자들의 공격이 쏟아질 만한 이슈였던 것이다. 어쩌면 1997년 박 후보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휴화산이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박 후보가 좀 더 일찍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논란이 될 일들을 미리 정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정희 정권 때의 과거사가 단순한 과거사로 끝날 성격의 일이 아니거니와, 살벌한 경쟁을 펼치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말이 통용되기가 어렵다. 물론, 박근혜 후보로서는 딜레마가 있다. 아버지 시대의 잘못에 대해 일일이 사과를 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이 생기고, 자신이 지금 이 시점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일종의 승부수를 던졌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대통령 선거는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 지식정보화 시대와 연관되는 세 후보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의 2세이다. 또 문재인 후보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그리고 안철수 후보는 대한민국 지식정보의 아이콘처럼 부각되어 있다. 젊은 층과의 공감 노력도 트렌드에 부합한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각각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인 브랜드 파워를 구축했다면 그런 시대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두 후보는 거기에 실패했다. 박 후보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나머지 공(公)과 사(私)를 잘 분간하지 못했다. 문 후보 역시 노 전 대통령의 향수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미래를 보여주는 데 성공하고 있지도 못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박 후보와 문 후보는 과거형 지도자로 분류될 위험성이 있다. 반면에 안철수 후보의 이미지는 미래형에 가깝다. 하지만 안 후보는 정치 경험이 부족하고 함께 할 정치 세력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향후 5년의 대한민국을 맡기기에는 불안한 구석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안철수 후보가 제1당 및 제2당의 후보와 정립(鼎立)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은 이번 대선이 과거 대(對) 미래의 싸움으로 전개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시간 구도로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에 가장 큰 피해자는 박근혜 후보이고, 최대의 수혜자는 안 후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박 후보에게 남은 과제는 스스로 미래형 지도자임을 입증함으로써 과거사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논란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성패의 뿌리는 의리와 이익, 공명정대함과 사사로움의 사이에서 싹트며, 선악의 기미와 그것이 발현하는 실마리는 머리카락만큼 지극히 작은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경고했다. 또 한비자(韓非子)는 “높고 튼튼한 제방도 개미나 땅강아지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고 했다. 가슴에 와 닿는 명언들이다. 아무튼 누가 되든 이번 대통령 선거가 과거사를 둘러싼 싸움으로 일관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비전 경쟁이 실종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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