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대한민국, 어떻게 가능한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성공은 행복의 열쇠가 아니다. 그러나 행복은 성공의 열쇠다.”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현실에서는 잘 통용되지 않는다. 특히 대한민국은 여전히 성공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그럴 수 없이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도, 모두들 행복감 혹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문화일보가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와 함께 매년 실시하는 ‘OECD 국가 행복지수’ 조사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은 늘 꼴찌이다. 심지어 초·중·고교생들의 행복지수는 최하위인 데다 평균과의 격차가 지나치게 크다. 전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우리나라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낮은 빈곤국들의 행복지수가 더 높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영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신경제재단(NEF)가 지난 6월 17일 전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한 ‘국가별 행복지수’를 발표했는데, 1위는 중미의 코스타리카였다. 코스타리카에 이어 베트남, 콜롬비아, 벨리즈, 엘살바도르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상위 10위권은 모두 경제소국들과 중남미 국가들의 몫이었다. 행복지수가 GDP와 상관없음을 새삼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63위에 머물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순위라고 자위해야 할까?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을 한마디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 나름대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물질적인 욕구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물질적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GDP를 떠나 현실적으로 누리는 물질적 향유 수준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물질적으로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다. 기성 세대는 과거에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미래 세대는 어릴 때부터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서인지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급속한 산업화의 성공도 큰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둘째, 남과 비교를 잘 하는 편이다.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아파트, 자동차, 의류 등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물질적으로 비교당하다 보니 소득 수준을 뛰어넘는 과도한 소비를 하게 되며, 그럴수록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에 빠지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황폐화되고 있다. 국가적으로도 경쟁지상주의를 부추기다 보니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화되고 있다. 경쟁지상주의라고 하지만 엄연히 말해 ‘1등주의’이다. ‘1등을 위한 사회’이다. 그렇다고 1등이라고 늘 행복할까.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셋째, 계층 간의 격차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도 차단된 지 이미 오래이다. 그래도 이를 포기하지 못한 서민층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비로 가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고등학교까지는 엄청난 사교육비에 대학에서는 비싼 등록금 때문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서민층 자녀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도 어렵다. 그런 상황이니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도 없다. 장성해서까지 자녀들을 보살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전설처럼 사라져가고 있다.

넷째,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이다. 과거에는 ‘대망의 ○○년대’라는 정권의 구호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을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 희망이란 나라도 발전하지만, 내 삶도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희망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내 삶이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가진 국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성숙 경제’라서 과거와 같은 고도 성장이 어려운 데다, 새로운 발전 대안이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희망을 갖게 어렵게 하고 있다.

다섯째, 이 모든 이유 때문에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쉽지 않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연상하게 하는 냉엄한 사회이다. 경제 수준에 비해 복지 수준이 낮은 데다 ‘더불어 사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先) 성장 후(後) 분배’라는 말이 1960년대에 등장했는데, 지금도 그런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사회안전망의 취약, 이웃 공동체의 파괴, 가족관계의 황폐화, 나눔과 헌신이라는 미덕의 빈곤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재기를 힘들게 하고 있다. 철저히 성과주의, 결과주의만이 난무할 따름이다. 우리 국민들이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전’의 가능성 때문인데, 우리 사회는 점점 역전승이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대한민국’은 가치관, 제도, 전략, 리더십의 실패로 요약될 수 있다. 물질의 수준에 상응하는 정신의 고양(高揚), 더불어 사는 지혜, 복지제도의 확충과 이를 위한 책임의 분담,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라는 국가 발전 전략, 산업구조의 정상화,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 여건의 조성, 이 모두를 추동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행복한 대한민국’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산업화 시대의 성장 신화’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10퍼센트에 육박하는 고도 성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1~2퍼센트 성장도 힘겨운 일이다. 대한민국의 성장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 온 산업 문명에 대한 성찰과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단적으로 대도시에 인구의 다수가 몰려 있는 것 자체가 기현상(?)이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만한 동력은 어디에도 없다. 노동 집약 산업의 시대가 아닌 데다 자본 집약 산업과 기술 집약 산업이 그런대로 잘 유지된다 하더라도 고용 창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소도시, 농촌으로의 유턴(u-turn)이 필요한 이유이다. 요컨대 제1차-제2차-제3차 산업 간의 균형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교육 혁신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바닥 수준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지나치게 비인간적이고 살벌한 교육 현장 때문이다. 학생들의 인격을 성적 순서로 매기는 이 가치 전도의 현실에서 무슨 행복이 피어나겠는가! 학교 폭력, 청소년 자살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그런 현실 때문 아닌가! 그렇다고 창의적인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도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이런 교육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정부 당국부터 경쟁지상주의 교육을 철폐하면 된다. 정부 당국이 나서서 초등학교까지 서열화를 부추기는 것은 당국부터가 얼마나 잘못된 교육관에 오염되어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셋째, 복지 제도와 책임의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여러 정황을 볼 때,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복지를 위해서는 그만한 재원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지금과 같은 낮은 담세율로는 어림도 없다. 특히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국민 다수의 세금 부담이 보편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특정 계층만의 부담으로는 보편적 복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관건은 우리 국민들이 증세를 수용하겠느냐이다. 물론, 세금 탈루 소득에 대한 보완 장치와 복지 전달 체계도 강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포함하여 복지국가 전반에 대한 정교한 설계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각 정당과 대통령 후보들은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넷째, 지나친 하드웨어 중심의 발전 전략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로 상징될 수 있다. 고층 빌딩,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도로망과 통신망 등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하드웨어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할 만큼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드웨어가 강세이다. 대한민국의 건설업이 OECD 평균보다 3배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물론, 여전히 하드웨어는 중요하고, 하드웨어의 확충도 부분적으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타당성과 효율성의 검토를 생략하고 벌어지는 무분별한 하드웨어 중심의 발전 전략은 바뀌어야 한다. 성남시와 용인시의 호화 청사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러고도 ‘동남권 신공항 건설’ 같은 타당성 없는 대선 공약이 나와서야 되겠는가!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보다는 휴먼웨어를 중시하는 발전 전략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아무리 위대한 물질 문명도 그것을 떠받쳐주는 정신 문명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붕괴하게 되어 있다.”고 일갈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 가치관과 시민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래서 절박한 일이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는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누가 과연 ‘행복 시대’를 열 만한 좋은 문제의식과 뛰어난 실천력을 갖고 있는지를 우리 국민들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어느 누가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되든, 실의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모두가 힘을 합쳐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앞장서주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 시선뉴스의 공식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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