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 매년 10월 수상자를 발표 그리고 매년 12월이 되면 열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시상식. 바로 노벨상입니다. 노벨평화상은 다른 부문과 다르게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은 물론이고 기관이나 단체에도 수여합니다.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1901년 앙리 뒤낭(스위스)과 프레데릭 파시(프랑스)가 공동 수상했고, 역대 최다회 수상자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1917, 1944, 1963년 각각 수상했습니다. 여기에 창시자인 앙리 뒤낭을 포함시킨다면, 국제적십자운동은 총 4회를 수상한 셈입니다. 

최초의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무기를 내려 놓으라!’를 쓴 여성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오스트리아)입니다. 베르타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음악 실력도 뛰어났으며, 귀족의 예의범절을 잘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서른 살 무렵, 빈의 주트너 남작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는데요. 그러다 7살 연하인 그 집안의 막내아들 아르투어 군다카르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주트너 집안에서는 당연히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죠. 

1876년, 두 연인을 떼어놓으려 고심하던 주트너 남작 부인은 ‘파리에 거주하는 매우 부유하고 교양있고 나이 지긋한 신사가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원숙한 연령의 비서 겸 가정부를 구합니다.’라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부인은 베르타와 조건이 잘 맞고 파리로 멀리 보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그녀에게 권유했고, 그녀 역시 아르투어와의 결혼을 체념하고 비서 자리에 취직합니다. 

알고 보니 광고를 낸 사람은 바로 ‘노벨’이었습니다. 당시 42세에 독신이었던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32세의 베르타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고, 함께 인간과 인생과 예술, 영원과 시간, 그리고 세상에서 전쟁을 없앨 방법 등에 대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평생의 동반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8일 뒤, 베르타는 인생의 갈림에 선 두 통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일주일 후 돌아가겠다’는 노벨의 전보, 그리고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아르투어의 전보. 아르투어와 똑같은 마음이었던 베르타는 노벨에게 사과의 편지를 남기고 즉시 빈으로 돌아가 몰래 결혼식을 올리고 그루지아(지금의 조지아)의 캅카스 지방으로 도피합니다. 

노벨과는 그렇게 짧은 인연으로 헤어졌지만, 두 사람은 노벨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 왕래를 계속합니다. 노벨은 평생 베르타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일생의 동지이자 물심양면의 후원자로 남습니다. 노벨이 평화상을 제정하는데 베르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타는 1905년 제5회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입니다. 이번 노벨상 수상자 중 유일한 여성 수상자인데요. 노벨상이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며 노벨상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한반도는 현재 휴전 중입니다. 1953년 7월 27일 미국, 중국, 북한은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에 서명하고 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이는 언제라도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접하며 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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