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윤수 수습]

▶ 허준
▶ 출생-사망 / 1539년 ~ 1615년 
▶ 시대 / 조선시대
▶ 활동분야 / 의학자

서자출신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은 허준은 선조와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최고의 벼슬에 올랐으며 의학적 전통을 통합한 ‘동의보감’을 편찬했다.

- 유희춘의 병치료에 참여하며 의술을 뽐낸 허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난 허준은 무관이었던 할아버지 허곤과 아버지 허론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제법 권세 있는 가문으로 알려진 집안에서 자란 허준은 서자였지만 큰 차별이 없이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고 전해진다.

허준이 어떠한 이유로 의학자의 길을 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는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에 유학자인 유희춘이나 일가의 병치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이를 통해 그가 관직에 들어가기 전에도 의술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광해군의 병을 고쳐 선조의 신임을 얻은 허준

허준은 1569년 유희춘의 얼굴에 난 종기를 완치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유희춘의 신임을 받게 된다. 이후 유희춘은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내는데 그 덕분에 그는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오른다. 당시 소문난 명의로 인정받은 허준은 의과도 통과하지 않았고 서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 허준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다가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선조의 인정을 받게 된다. 당시 광해군은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는데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친 것이다. 이후 선조는 허준에게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 신분의 한계를 넘어 양반의 자리에 오른 허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은 허준은 임진왜란 중에 또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의술을 인정받았다. 이후 그는 동반이란 벼슬에 올랐는데 양반 중에 하나인 문관을 의미하는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선조는 힘겨웠던 전쟁기간 동안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공을 인정해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자리를 내렸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허준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주변 사간원과 사헌부의 시샘을 받게 됐다.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망령되어 약을 써서 선조를 죽게 했다”는 죄로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당시 광해군은 허준의 의술이 부족해 선조를 살리지 못했을 뿐이라며 감쌌지만 문관들의 견제로 인해 결국 허준에게 1년 8개월이란 귀양살이를 보내게 됐다.

- ‘동의보감’ 편찬 후 의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허준

허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중요한 업적으로 남은 ‘동의보감’ 편찬에 열성을 쏟았다.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을 받은 동의보감은 훗날 우리나라의 한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10년 완성된 동의보감을 허준은 광해군에게 바쳤고, 1615년 일흔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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