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최지민] 황소, 흰소, 길 떠나는 가족,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그 중 황소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중섭인데요. 그는 사후 한국 미술계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 했지만 생전에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1956년 늦은 봄... 거식증에 시달렸고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20세기 초 탄생한 적십자병원은 지금까지 사회 안전망의 최전선에서 끊임없이 공공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요. 공공의료의 중심, 적십자병원은 어떤 곳일까요?

적십자병원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에 탄생했습니다. 고종은 1905년 7월 8일 “대한국적십자병원을 설치해 군인과 백성 중 병상자를 구료하라”는 조치를 내립니다. 조선왕조 내내 혜민서, 활인서 등을 통해 구현해 온 공공의료를 계승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념으로 세워진 병원은 1905년 9월 15일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하여, 1907년 광제원과 적십자병원이 대한의원(현재 서울대병원)으로 합병되기까지 총 62,730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절, 적십자병원은 폐지와 부활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 강제병합(1910년) 후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한 대한적십자회는 1920년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해 공공의료 활동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열악한 재정과 일제의 탄압으로 간호원 양성은 제1기를 끝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찾아온 또 다른 시련 한국전쟁...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국가 인프라가 무너지면서 적십자병원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과 전후 기간에는 스웨덴과 독일적십자병원을 중심으로 공공의료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은 우리나라에 의료기술을 전수하여 1958년 국립의료원(현재 국립중앙의료원)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적십자병원은 개안수술과 구순구개열 일명 ‘언청이’ 수술 등 우수한 의료기술을 선보이며 우리나라 공공의료를 선도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병원선을 운영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전국에서 13개의 병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폐원했지만 영화 ‘택시 운전사’에 광주적십자병원이 나오는데요. 당시 적십자병원의 위상과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9년 국민의료보험 전면 시행, 민간 의료기관의 급증 등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적십자병원은 침체기를 겪습니다. 재정상황이 나빠져 일부 병원은 문을 닫아야 했고, 현재는 7개 병원(서울, 인천, 상주, 통영, 거창, 영주, 경인의료재활센터)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적십자병원은 서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12년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시작한 희망진료센터는 공공의료의 롤 모델로 자리를 잡았는데요. 기업, 대학병원과의 3자 협력으로 의료 소외 계층에게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 발발 초기. 6개 적십자병원은 선별진료소를 운영하고 2월에는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감염병이 확산되면서 상주와 영주병원 그리고 인천병원(12개 병상)이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됩니다. 이후 3월 3일 통영병원이, 4월 6일 서울병원이 각각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 공공병원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성적인 경영적자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코로나와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 기존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고 내원 환자를 받을 수 없어 그 손실은 더 커진다고 합니다.

인력이 부족함에도 무급 휴가를 권고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급여를 제 때 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공공의료가 무너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공공의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서민들을 위해서라도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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