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디자인 최지민, 김동운 수습] 올해는 3.1운동 101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각종 미디어를 포함해 우리 민족적 기개를 알리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행사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이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습니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농촌 등지로 전파되었고,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게 되었고, 갈수록 참여 인원과 계층도 늘어나면서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운동은 국내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국외로도 확신이 됐는데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 독립시위가 벌어지게 됩니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됩니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2단계(도시확산기)는 3월 10일을 전후로 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습니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습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역사적 기록으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한편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1 운동의 명칭을 '3.1 혁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요. 국민들의 여론이 있는 만큼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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