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지민]

▶ 빅토르 마리 위고 (Victor Marie Hugo)
▶ 출생-사망 / 1802. 02. 26. ~ 1885. 05. 22.
▶ 국적 / 프랑스
▶ 활동 분야 / 작가, 정치가

프랑스의 위대하고 대중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빅토르 위고’. 그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지도자이자 프랑스 혁명과 공화주의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1885년 빅토르위고가 사망하자 국장이 치러지고 개선문에 빈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불행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

1802년 2월 빅토르 위고는 육군 소령이자 이후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 된 조제프 레오폴드 시지스베르 위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위고의 부모님은 각각 애인이 있어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불행한 시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위고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위고는 문학에 흥미를 갖고 뛰어난 작가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며 꾸준히 습작을 했다.

촉망받는 기대주가 된 위고

1819년 17세의 나이로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라는 평론지를 창간한 위고는 이듬해 첫 번째 시집 <오드 및 기타 시>를 출판한다. 이로 인해 그는 고전파로부터 숭고함의 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촉망받는 기대주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규범을 강요하는 고전주의는 위고에게 있어서 문학적 완성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다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마침내 위고는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젊은 위고는 고전파의 극작법을 공격하며 독창적인 운문으로 낭만주의를 선언했다.

낭만주의의 대표가 된 위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은 위고가 1830년 희곡 〈에르나니〉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르나니〉가 초연되던 극장에서 두 파는 서로에게 야유를 퍼붓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결투가 벌어져 죽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후 위고는 낭만주의의 기수로 여겨졌고, 문학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감정 및 영감의 자유로운 표출을 추구했다. 위고가 처음에는 희곡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1831년 루이 11세 치하의 중세 생활을 연상시키는 역사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을 발표하며 민중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무렵 프랑스의 혼란한 사회·문화적 모습과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겪는 고통을 그려낸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위고는 당시 프랑스 민중의 삶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통해 프랑스의 국가 정신과 예술의 살아있는 화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충실한 시기였던 망명 기간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당시 반대파로 활동하여 국외로 추방되어 19년간 망명 생활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망명 생활이 그에게 있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고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시집 <징벌>, <명상시집>, <세기의 전설>, 소설 <레 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 <웃는 남자> 등 위고에 있어서 걸작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나왔다. 1885년 5월 세상을 떠난 위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프랑스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프랑스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날 만큼 사랑받는 작가인 ‘빅토르 위고’. 현재도 그의 작품이 영화나 뮤지컬 등으로 재탄생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그의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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