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최지민]

▶ 알렉산더 구스타브 에펠 (Alexandre Gustave Eiffel)
▶ 출생-사망 / 1832.12.15 ~ 1923.12.28.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엔지니어
▶ 주요작품 / 에펠탑, 포르투칼 대철교, 카라비의 수도교

알렉산더 구스타브 에펠은 프랑스의 엔지니어로 철골교 설계에 있어 독창적인 능력을 떨쳤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에펠탑을 건설했고, 이외에 자유의 여신상, 파나마 운하 등의 공사에도 참여했다.

‘암기’식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구스타브 에펠

1832년 파리로부터 남동쪽에 위치한 디종에서 태어난 구스타브 에펠. 지방정부 행정관 아버지와 목재상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구스타브 에펠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그에게도 유년시절 고민이 있었다. 바로 ‘암기’ 방식의 학교 수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구스타브 에펠은 문학과 과학에는 흥미를 느꼈고 이 두 과목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구스타브 에펠에게는 그가 믿고 따르는 좋은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그의 앞날에 등대가 되어 주었다. 스승은 바로 화학에 뛰어난 지식을 보유한 삼촌과 삼촌의 친구였다. 구스타브 에펠은 두 사람을 따르며 화학과 수학의 실용적 가치를 함양할 수 있었고, 이는 구스타브 에펠이 남긴 업적에 좋은 바탕이 되었다.

청년 구스타브 에펠, ‘철’을 만나다

18살이 된 구스타브 에펠은 콜라주 생트 바르브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학업보다는 호기심이 왕성했던 구스타브 에펠에게 파리 도심의 건축물과 패션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이후 그는 ‘중앙공예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외인 점, 에펠탑과 운하 등 설계에 능한 것으로 알려진 구스타브 에펠은 사실 대학시절 기술 도안 부분에 굉장히 서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계 공학’ ‘토목공학’ ‘화학’ 중 전공을 선택해야 할 때에도 당연히 ‘화학’을 선택하기도 했다. ‘철의 마법사’라 불리는 구스타브 에펠의 대학생활은 이처럼 물음표로 가득했는데, 그의 업적에 초석이 되어준 때는 바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다. 22살의 청년이 된 구스타브 에펠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악렉상드르 바로가 철로 만든 ‘산업의 궁전’을 보았고 여기서 큰 자극을 받게 된다. ‘철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중요한 재료구나’ 구스타브 에펠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철의 마법사’ 구스타브 에펠

‘철’에 꽂힌 구스타브 에펠. 마침 그의 처남이 주철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구스타브 에펠은 이 공장의 도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스승 ‘샤를 누보’를 만나면서 ‘철의 마법사’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구스타브 에펠은 스승과 함께 보르도 근교의 갈론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계획, 후반에는 혼자서 500미터에 이르는 철교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철의 마법에 매료된 구스타브 에펠은 밤 낮 없이 노력하기 시작했고 그의 독특한 발상과 뛰어난 상상력을 철의 특성에 새로운 방법으로 녹여내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의 주요 철교 건설에 합류했고 그의 노력에 힘입어 프랑스의 철교 건설 능력은 영국의 그것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를 비롯해 포르투갈 등 주변국에도 다양한 철교와 고가교를 만들었으며 그렇게 구스타브 에펠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자유의 여신상-에펠탑의 탄생

1885년 구스타브 에펠은 프랑스와 미국의 영원한 우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작업에 함께 했다. 에펠의 계산법대로 철굴 구조로 만들어진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의 베들로 섬에 세워졌고, 훗날 뉴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또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이름을 딴 그 유명한 에펠탑을 파리 중심부에 세웠다.

이 역시 파리의 트레이드 마크로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외 항공 역학에도 관심을 품은 구스타브 에펠은 1912년 시험풍동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훗날에 영원히 기억될 만큼 승승장구 하던 구스타브 에펠, 그러나 그에게도 그늘은 드리워졌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 ‘마리’의 이른 죽음은 구스타브 에펠에게 아픔이 되었고, 그가 주도하 파나마 운하의 건설 역시 실패로 돌아가 사기 혐의로 고소까지 당하기도 했다.

노년에도 식지 않은 도전의식

61세에 은퇴를 결심한 구스타브 에펠. 비론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또 다른 도전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층 건축물에 대한 공기 역학에 상당한 관심을 둔 구스타브 에펠은 자신의 에펠탑을 이용해 많은 실험을 거행했고 결국 최초의 공기역학 실험실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식지 않은 열정을 소유했던 구스타브 에펠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다양한 작업을 이어갔고, 철의 마법사라는 수식을 남긴 채 1923년 12월 28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구스타브 에펠은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건축물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각 지역의 트레이드마크로 남아있다. 실용주의와 자유주의를 철로 풀어낸 구스타브 에펠, 철을 주재료로 삼는 근대 건축기술 속에 그의 열정은 여전히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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