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알코올과 마약에 시달리면서도 깊은 감성을 끌어낸 화가 ‘모딜리아니’
[카드뉴스] 알코올과 마약에 시달리면서도 깊은 감성을 끌어낸 화가 ‘모딜리아니’
  • 보도본부 | 박진아 기자
  • 승인 2020.01.18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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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최지민] 긴 목과 타원형의 얼굴, 우아하고 애수가 깃든 여인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 

부르주아 출신임에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파리의 뒷골목을 전전하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젊은 예술가는 '몽마르트의 보헤미안'이라고 불리며 벨 에포크 시대 가난한 젊은 예술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대표작으로 <첼로 연주자>와<여인 두상>, <잔 에뷔테른의 초상> 등을 그린 예술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모딜리아니는 그의 출생으로 인해 집이 망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모딜리아니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집안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지방 행정관이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모딜리아니를 낳고 있었습니다. 

이때 옛 속담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어머니 옆에 두어 약간의 재산을 남길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인 생활은 태어나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늑막염과 장티푸스로 고생한 모딜리아니는 사실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를 정규교육을 받길 원했지만, 건강상 쉽지 않았고 또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그의 희망에 따라, 1899년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 선생 중 한명인 구글리엘모 미켈리에게 그를 보내 미술 공부를 시키게 됩니다. 

그러다 1906년 모딜리아니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의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작은 스튜디오를 빌려 생활했는데 1년이 채 되지 않아 말쑥했던 외모는 유랑하는 사람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빈민가를 돌아다니며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초기에는 하루여 100여장의 그림을 그리는 등 엄청난 속도로 그림 작업을 하기도 했죠.

1917년. 19살의 에뷰테른을 만나며 함께 살게 됩니다. 에뷰테른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생활을 했고... 같은 해 겨울, 모딜리아니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화가 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던 것인지... 오픈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유리 전시장에 걸려있던 누드 작품으로 인해 경찰이 제재했고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졌죠. 

이후 니스로 떠난 두 사람은 딸을 낳고 함께 파리로 돌아가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그들만의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평온한거 같았던 그의 삶에 또 다시 비극이 찾아옵니다. 1920년,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게 된 겁니다. '결핵 수막염'으로 의사조차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으며 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침대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해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났고 이를 견디지 못한 에뷰테른은 그가 죽은지 이틀 후, 5층에서 뛰어내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형식이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도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완성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코올과 마약,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순수하고 깊은 감성을 끌어낸 모딜리아니. 보답 받지 못한 생애가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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