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최지민]

▶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Sirimavo Bandaranaike)
▶ 출생-사망 / 1916년 04월 17일 ~ 2000년 10월 10일
▶ 국적 / 스리랑카
▶ 활동분야 / 정치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을 잃은 후 정치에 뛰어들었고 총리직에 올라 신중한 정책을 펼치며 스리랑카의 많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스리랑카의 상류층에서 자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1916년 스리랑카의 봉건 지주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성장할 시기에 당시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서구지향적인 분위기가 정치계에 퍼져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의회의 참의원이었다. 엘리트 가문에서 자란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건너갔다.

시리마보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24살이 되던 해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를 졸업한 변호사 출신이었는데,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47년부터 통일국민당 소속 의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시리마보는 내조에 전념하며 초반에는 남편의 정치 활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스리랑카자유당의 당수로 선출

시리마보의 남편 솔로몬은 1951년 당시 스리랑카의 주요 정당이었던 통일국민당의 정치 성향과 다른 스리랑카자유당을 창설했다. 스리랑카자유당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민족과 정당을 통합시킨 솔로몬은 1956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시리마보는 총리의 부인으로서 사회복지사업에 주로 몰두했다.

원만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시리마보에게 1959년 엄청난 슬픔과 충격을 주는 사건이 찾아왔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신할리족과 타밀족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솔로몬은 양보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유화정책을 폈는데 기존세력은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결국 한 승려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을 대신해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서 스리랑카자유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족벌 정치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난 시리마보

시리마보는 남편의 유지를 따라 사회당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해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했고 많은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그녀는 1960년 세계 최초로 여성으로서 총리직에 올랐다. 자유와 민족주의를 구현하며 스리랑카자유당의 행보를 이어가던 시리마보는 결국 상류층 출신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정치 실무를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스리랑카에서는 반다라나이케 가문의 족벌 정치가 시작됐다. 그 후 남편의 조카였던 펠릭스의 재정정책 실패로 당내 지도부의 내분이 일어나 스리랑카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그 결과 1965년 선거에서 참패했고 시리마보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수많은 격변을 겪고 단단한 정치인으로 변모

그러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여기서 정치 인생을 멈추지 않았고 더욱 단단한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1970년 선거에서 사회주의 정당연합체와 통일전선을 결성해 총선거에서 압승했고 다시 총리직에 올랐으며, 그녀는 1972년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했고 베트남, 북한 등 공산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해 제 3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또다시 지지정당 내에 갈등이 일어나 시리마보는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통일국민당으로부터 정치적 과오를 공격받아 의회에서 쫓겨났다. 이로써 그녀의 정치인생이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암흑기가 있었지만 1986년 사면복권 되었다. 이후 시리마보의 둘째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1994년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은 수많은 격변을 겪었지만 신중한 국정운영과 원만한 외교로 정치인으로서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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