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디자인 최지민]

▶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 출생-사망 /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화가

앙리 마티스는 야수주의 창시자로 강렬한 색채와 빛의 기법을 이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표현했고 20세기 회화를 선도한 예술가로 남았다.

-뒤늦게 영감을 받아 화가로 전향한 앙리 마티스

북프랑스의 카토 칸브레지 출신의 앙리 마티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족들의 바람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한때 법원의 재판행정담당 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 20살이 되던 해에 심한 맹장염으로 병상에 누워 있게 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아픈 그를 위해 물감통을 선물했다. 앙리 마티스는 물감통을 일종의 파라다이스라고 느꼈고 데생과 회화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로 앙리 마티스는 22살, 다소 늦은 나이에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되었고 1892년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는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를 목표로 공부를 하며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부그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에서 수학하며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유명 작품들을 통해 영감을 받아 강렬한 색채를 표현

앙리 마티스의 초기 작품들은 어두운 색조의 정물화와 풍경화들이 많았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클래식한 화풍만 그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앙리 마티스는 예술가 존 러셀과 소통을 하며 거칠고 화려한 색감을 추구하게 되었고 특히 반 고흐의 작품에 강한 영감을 받았다. 반 고흐 작품의 빛과 색채는 마티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마티스는 로댕, 고갱, 세잔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티스는 새로운 화풍을 찾기 위해 빚까지 지며 작품들을 사들였고 급기야 파산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특히 그는 많은 작품들 중 세잔의 작품에 크게 매료됐는데 독특한 시각을 담아낸 세잔의 작품들은 마티스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마티스는 강렬한 색채의 작품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냈다.

-활기가 넘치는 야수파 화풍을 개척한 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는 주변 예술가들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들의 작품들은 강렬하고 거친 색감이 가장 큰 특징이었는데 특히 1906년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색의 다양한 색감이 섞여 있는 이 작품을 본 당시 평론가는 마치 야수들에 둘러싸인 다비드상 같다며 논평했다.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마티스와 친구들의 작품들을 야수 그림으로 불렀다.

야수파의 화풍을 이어간 앙리 마티스는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색감을 이용해 행복한 이미지의 작품을 그렸다. 그는 무생물보다는 생생한 색감의 천에 둘러싸인 사람들을 표현하는데 집중했고 자연광의 색조에 활기가 넘치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아 다양한 회화 양식과 빛의 기법들을 이용했다.

-전쟁 상황 속에도 행복을 추구한 앙리 마티스

한편 앙리 마티스는 1차 세계대전을 겪게 된 후 자신의 작품 세계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림의 색채는 다소 어두워졌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시기에 다시 자신만의 밝고 강렬한 느낌의 작품들을 선보였고, 얼마 후 또 다시 2차 세계대전을 겪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 마티스는 자신만의 밝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계속 그려나갔다.

사람들은 마티스가 사회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어둡고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행복을 추구했고 세상에 없는 밝음과 순수함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지쳐버린 이에게 휴식처 같은 그림, 균형 잡힌 때 없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전했다. 한때 히틀러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저질 작품으로 매도했지만 강렬하고 원시적인 색감과 자유로운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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