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환관’, 내시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
[카드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환관’, 내시와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
  • 보도본부 | 박진아 기자
  • 승인 2019.11.1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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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박진아, 이시연 수습기자/ 디자인 최지민, 구본영 수습] 옛 조선이나 명나라, 청나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미천한 천민이나 평민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환관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 흥덕왕이 왕비가 죽자 슬픔에 쌓여 새로 맞은 왕비와 시녀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심부름꾼인 환관만 곁에 두었다고 나와 있다. 이가 국내 최초의 환관 기록이다.

환관과 내시는 거세를 한다는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궁내에서 맡은 역할은 차이를 보인다. 환관은 궁궐에서 일을 하는 거세한 남자를 뜻하며 신체 특성상 궁궐 여성들의 숙소에 살며 경호원이나 잡일을 맡아서 했다. 오늘 날의 ‘경호처’와 비슷한 역할이다.

반면, 내시는 관리 중 하나로 궁궐 내부에서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궁궐 의전, 궐문 수위, 청소 등을 담당했던 내시부의 거세된 남자 관원을 말한다. 오늘 날의 ‘보좌관’과 비슷한 역할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때까지만 해도 환관과 내시를 구분된 직책이라 여기고 하는 일도 달랐으나 고려 중기 이후, 환관들이 관리직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내시와 환관의 구분이 사라졌다.

거세를 했다고 해서 모두 환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차 신체검사 시험을 통과한 어린 예비 환관들은 내시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 고참 환관들에게 고문과 테스트를 받으면서 인내력을 시험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궁내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재목이 될 수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었다.

혹독한 선발을 통해 최종 선발된 어린 환관은 90명 정도. 금기사항 중 하나가 마늘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늘이 양기를 돋우는 음식이기에 금지시켰다.

한편, 명나라, 청나라 환관들은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권력 있는 환관들은 궁녀들과 함께 가정생활을 꾸리기도 하고,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다. 이때 평민뿐만 아니라 사대부 가문의 규슈까지 환관을 통해 권력을 잡기 위해 환관과 혼인하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조선과 명나라, 청나라 환관의 권력과 재력은 어마어마했다. 조선 환관은 월급을 쌀로 받았다. 가장 낮은 월급이 쌀 9말에서 최대 쌀 1석 1말, 콩 10말을 받아 정1품 관료보다 많이 받았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어 가난 집에서는 아들을 고자로 만들어 환관을 시켰다.

*우리나라 환관제도의 폐지

우리나라 환관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지금의 서울 효자동(孝子洞)의 명칭은 원래 환관인 화자가 많이 산다 해서 화자동이라 하다가 후에 이 음과 비슷한 효자동으로 고쳤다고 한다.

*특별한 그릇

환관들은 잘라낸 자신의 고환을 잘 말릴 후 ‘양물단지’에 보관했다. 이는 죽은 후 고환을 다시 몸에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내시들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양물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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