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과부의 절개가 미덕이었던 시대는 언제였을까?
[카드뉴스] 과부의 절개가 미덕이었던 시대는 언제였을까?
  • 보도본부 | 김아련 기자
  • 승인 2019.10.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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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지민]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하다 보면 과부가 절개를 지키는 내용이 흔하게 다뤄진다. 현대의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절개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절개를 지키는 여성에게 상을 내리고 이를 기리기 위한 비석인 ‘열녀비’와 기념문인 ‘열녀문’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런 관습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1485년, 성종 16년에는 <경국대전>에 재가부녀(再嫁婦女)와 서얼의 자손은 벼슬길을 막는다는 조항을 넣어 남편이 죽으면 재혼할 수 없는 것을 법제화했다. 또 중종 때부터는 개가 자체를 범죄로 여겼다.

여성이 재혼을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후 여자들은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야 했다. 만약 과부가 된 여자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재혼을 한 경우에도, 그 자식은 양반의 신분을 가졌어도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또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3년간 무덤을 지켜야 했고, 이후에는 평생 상복을 입고 지내도록 강요당했다.

절개가 곧고 희생적인 삶을 산 여인들. 조선시대에 세워진 열녀와 열부를 기리기 위한 ‘열녀문’과 ‘열녀비’는 현재 전국 곳곳에 아직도 남아있다.

충북 충주시에 있는 ‘함양박씨 열녀비’는 <열녀 함양박씨전>이야기로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실제로 연암 박지원이 현감으로 지내던 179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전의 딸이었던 박씨 부인은 열아홉의 나이에 함양군 아전의 아들과 혼인했다.

박씨의 신랑은 몸이 아픈 환자였는데 반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박씨는 예법에 따라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모셨다. 그녀는 며느리의 도를 다하다가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제사인 남편의 대상(大祥) 날에 음독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함양박씨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열녀비를 세웠다.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에 있는 조선시대 열녀문인 ‘언양김씨 열녀문’도 유명한 열녀문 중 하나다. 이는 병자호란 때 절개를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언양김씨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언양김씨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에게 붙잡혀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절개를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죽음까지 불사하는 열녀에게 상을 내리며 절개를 강요하던 당시 조선시대 풍토에 대해 사람들은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때 한동안 여성의 재가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1894년 처음으로 동학농민운동에서 여성의 재가를 허용해달라는 주장을 농민들이 제기했다. 결국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갑오개혁 때 재가녀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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