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지민, 구본영 수습]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잔혹한 정치적 반대파 숙청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사회주의 독재와 전체주의 광기로 수많은 국민이 희생된 비극이기도 한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0년간 '홍위병'을 앞세워 야만적 숙청을 했고, 중국 측 통계로만 17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학살로 이어졌다. 

‘홍위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 대혁명 당시 조직된 극단주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대부분 중학생에서 대학생 사이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마오쩌둥과 그의 이념을 종교적으로 숭배했다. 

1966년과 1968년 사이에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마오쩌둥의 정적이나 '구시대적', '부르주아적'이라고 간주된 모든 것에 폭력을 행사하거나 철저히 파괴하는 급진성을 보였다. 이후 다른 나라에서는 극단행동을 불사하는 급진파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홍위병은 크게 봉황파(보수파)와 조반파(혁명파)로 나뉘었는데, 1966년 당시 처음으로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홍위병이 조직되었다. 중국 고위 관료 자녀 출신의 홍위병은 대부분 봉황파의 조류에 속했으며, 조반파는 노동자, 농민 자녀들의 비중이 높았다. 

이들 중 초반에 과격한 폭력성을 보였던 그룹은 봉황파에 속했으며, 봉황파의 경우는 모택동에 대한 충성과 믿음을 강조하고 모택동의 반대파를 테러하거나 공산주의적 문화를 주장하여 문화재 파괴를 주도했다. 

한편 조반파의 경우는 모택동 자체의 인물보다는 모택동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촌 지역의 문화대혁명 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조반파가 홍위병의 상당수를 차지했고, 이들은 중국 대지진에서의 봉사 활동과 하방운동에서의 농촌 근대화로 초반 봉황파 홍위병에 대한 인민들의 좋지 않았던 이미지를 고쳐나갔다.

그러나 모택동에 대한 반대파 탄압과 극단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에 홍위병은 내부에서도 분파가 심화되어 홍위병끼리도 유혈 충돌이 발생하는 여러 사건이 일어났고, 중화인민공화국 경찰의 통제력은 상실되었다. 그렇게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이 끝나자마자 매우 빠르게 몰락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촛불집회와 검찰 개혁 문제를 가지고 여야가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다. 여당은 촛불집회를 검찰과 보수 야당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경고'로 규정했고 이에 제1·2야당은 촛불집회를 '홍위병 정치'를 통한 여론조작 시도라고, 검찰 수사에 대한 여권의 직·간접적인 압박을 '사법 계엄령'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런 현 상황을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시기에 비유하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야당에서 조국 전 장관의 파동 기간 친문 세력이 중국 홍위병을 방불케 했다는 지적을 하며 여야 의원들의 날 선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문제 해결을 위해 진영의 논리에 따라 과잉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대화를 통해 조속히 합의에 이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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