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노벨평화상 받은 이유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노벨평화상 받은 이유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 보도본부 | 이연선 pro
  • 승인 2019.08.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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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 안드레이 사하로프 (Andrei Dimitrievich Sakharov)
▶ 출생-사망 / 1921.5.21 ~ 1989.12.14
▶ 국적 / 러시아(소련)
▶ 활동분야 / 물리학
▶ 주요수상 / 스탈린상, 레닌훈장, 노벨평화상(1975)

러시아(구소련)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구소련에 막강한 군사적 힘을 실어 준 ‘수소폭탄’ 개발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의외로 핵전쟁과 핵실험 반대 등 평화의 업적을 더욱 인정받은 그는 노벨평화상(1975년)을 수상했다.

- 과학자로서의 재능 + 평화적 소양
1921년 5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한 안드레이 사하로프. 물리교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리학에 대한 재능을 이어받았고, 그 이면에 ‘사형제도’를 줄기차게 반대해 오던 변호사인 할아버지로부터 평화에 대한 가치관을 물려받았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구소련의 교육제도를 불신했던 아버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으며 지식과 다양한 소양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는 17살이 되던 해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며 물리학자로서의 한걸음을 내딛었다.

- 애국심으로 꽃피운 의외의 재능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대학을 졸업하던 194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다. 그는 우수한 인재였기에 대학원 진학을 권유 받았지만 이를 고사하고 애국심 하나로 자원병 선발에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심장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그는 발탁되지 못하고 그나마 한 군수공장에 배치되어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며 소련의 다양한 무기 실험과 양질의 무기 개발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43년 이곳에서 첫 번째 아내를 만나 그녀가 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약 26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

- 수소폭탄의 아버지...하지만 놓지 않은 평화적 가치관
군수공장에서 임무를 수행한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물리학에 대한 더 큰 포부를 이루기 위해 1945년 레베제프 물리학연구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꿈의 무기로 불린 수소폭탄 제조의 이론적 과제를 상당부분 풀어냈다. 그 이후 그의 업적이 알려지며 이른바 천재 물리학자로 불려 졌고, 특히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각종 훈장을 받았다. 그렇게 그는 실제 수소폭탄을 만들기 위한 비밀 연구팀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마음속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던 ‘평화’에 대한 소신 때문이었을까... 수차례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당시 구소련을 집권하던 공산당으로부터 다양한 제안을 받았지만 그들의 반인륜적인 행동들에 반대하며 응하지 않았다.

- 성공적 수소폭탄 실험과 쏟아지는 찬사들
그런데 어느 날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속한 연구팀이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비밀연구팀에 포함되는 변화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곳에 속했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소폭탄에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난제를 풀어냈다. 그렇게 뛰어난 업적으로 개발에 필요한 필수 인재가 된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1950년부터는 비밀연구팀을 위해 조성된 비밀의 도시 ‘아르자마스-16’을 오가며 20년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그가 연구를 이끌었던 기간 동안 구소련은 무려 세 차례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이름을 딴 ‘사하로프 슬로이카’라고 불리는 설계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찬사를 받았다.

- 의도와 다르게 사용되는 업적들...핵실험 반대로 이어져
수많은 돈과 명예를 손에 쥐게 된 안드레이 사하로프. 하지만 왠지 그의 내면에는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업적과 공이 쌓일수록 ‘핵무기 보유국’을 둘러싼 세력 다툼과 평화를 가장한 핵 보유에 대한 기 싸움이 팽팽해져만 갈뿐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세계의 평화는 점차 훼손되어 갔고,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눈에 핵실험과 그로 인한 폐해는 끔찍하게 여겨졌다. 자신이 꿈꾸던 진정한 ‘평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사하로프는 핵 반대 노선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고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체제를 비판하며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행보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이 핵 평화 조약의 뿌리로
점차 과학자로서의 진정한 사명감에 눈을 뜬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이후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암,유전병 등 난치병 치료에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핵실험이 초래할 수많은 폐해와 인류의 멸망에 대해 심각성을 알리고 본격적인 핵 반대 움직임에 앞장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의 ‘핵실험 반대’ 행보는 전 세계에 귀감이 되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효과를 보기 시작해 구소련을 비롯해 미국, 영국 간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 체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향후 1996년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의 뿌리가 되었다.

구소련 당시 수소폭탄 개발에 큰 공을 세워 다양한 훈장을 받았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그렇게 그는 강한 무기를 개발한 물리학자로 명성을 쌓았지만, 정작 그의 업적은 ‘평화’적 행보에서 더욱 빛이 났다. 이론과 실상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기에 ‘핵’의 위험성을 허심탄회하게 피력할 수 있었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평화에 대한 소신. 1989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놓지 않았던 평화에 대한 그의 진심은 세계 평화의 뿌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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