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연선] 영화 봉오동 전투는 출연진들의 단체사진과 과거 독립군의 사진이 싱크로율이 매우 높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봉오동 전투 관람에 앞서 봉오동 전투가 어떤 전투였는지를 알면 더욱 뜻깊게 관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조직된 독립군은 국경 근처에 있는 일본군들은 간헐적이고 산발적이며 지속적으로 괴롭혀 일본군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특히 1920년 6월 4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부대의 1개 소대는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하여 1개 소대 규모를 박살내 버렸다.

이에 일본군은 바로 1개 중대를 출동시켜 이들을 추격하였는데 독립군 사량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에 매복시키고 일부의 병력으로 일본군을 유도하여 사정거리에 들어 온 일본군에 일제 사격을 실시해 60명을 사살하는 쾌거를 거뒀다.

약이 바짝 오른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월강추격대대로 편성하여 출동시켰다.

이에 홍범도와 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는 열세한 병력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지형상 유리한 곳에서 일본군을 맞이하기로 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 부대는 전방 300m의 안산의 촌락으로 돌입하였다. 하지만 그 촌락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높은 부지에는 독립군들이 매복 중이었다. 그리고 일본군들이 사격범위 안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이미 큰 피해를 입고 난 후였다.

한 번 크게 데인 야스카와 부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다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하지만 야스카와 부대는 고려령에 도착했을 때 북쪽과 동북쪽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일본군은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중국 지린 성의 봉오동 계곡으로 유인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4개의 중대를 서북단, 동쪽, 북쪽,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시킨 후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여 서남산 중턱에 위치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유도했다. 그리고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의 사정거리에 도달하자 홍범도 장군은 일제 사격을 단행하였다.

봉오동으로 유인된 일본군들은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버렸다.

오후 3시가 되자 야스카와는 가미야 중대와 나카니시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 조기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뚫어내려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크게 격퇴당해 100여 명이 사살되었고 전의를 잃은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으로 패주하게 된다.

봉오동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여지가 없는 대승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를 거뒀으며 지형과 심리전을 이용한 완벽한 작전을 수행한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해 독립군은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으며 여기서 충만해진 사기는 이어지는 청산리 대첩에서도 크게 승리하는 발판이 된다.

SNS 기사보내기